보리수

ㄷㄷ(156.22)· 2026.07.13 13:38· 조회 0
딱 작년 이맘때였다.처음 그를 만난 곳. 환하게 웃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어려운 카리스마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가 함께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늘 정신없이 다녔다.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고, 일주일에 두 번 그를 만나는 날이면 더 바빴다.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던 모양이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점심을 먹고 나면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몫의 먹거리를 챙겨주곤 했다. 낯가림이 심하고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이 쉽지 않은 나에게, 그런 다정함은 오래도록 남는 온도였다. 가끔 내가 지쳐 보이면 장난스러운 농담으로 웃게 해주었다. 억지로 위로하지 않고, 웃음으로 마음을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몇 달 뒤, 내 차가 정비를 맡기게 되어 버스를 타러 가는 길. 그는 태국 음식을 잘하는 집이 있다며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처음으로 둘이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그렇게 여유롭던 사람이 얼굴이 붉어지고,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괜히 두 손으로 번갈아 볼을 문지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그 모습이 그 나이답지 않게 귀엽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주 두 번씩 자연스럽게 만났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저녁이면 와인 한 병을 열고, 여행하며 맛보았던 여러 나라의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서울 근교의 작은 별장에서 하루 이틀 머무는 일도 있었다. 음악 취향도 닮아 있었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살아온 시간들, 여행 이야기, 책과 그림, 그때그때 마음을 사로잡는 작은 것들. 우리는 손을 잡은 적도 없고, 입을 맞춘 적도 없었다.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마다 그는 늘 대문 앞까지 나와 내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여줄 게 있어.”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앨범을 가져왔다. 마침 내가 지금의 나이였을 때의 사진들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 우리는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알아본 사람들이구나. 서로를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오다 우연히 서로를 알아본 사람들이었구나~ 하지만 내게는 이미 오래전, 이룰 수 없었던 한 인연이 있었다. 그 인연의 무게는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했고, 평범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일조차 쉽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이 인연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어려웠던 내가 웃으며 찾아가는 곳이 생겼다는 것.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바깥세상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새, 누군가와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사람을 믿어보는 시간이 생겼다. 그는 종종 말했다. 내가 이런 삶을 누려도 되는 걸까.” 한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달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에 가까이 갔던 사람이, 이제는 쉼을 배우며 자신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그 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사람은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결국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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