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
51. 아빠는 아빠가 되고 싶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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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과유불급(過猶不及)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수많은 무시와 무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 공세를 퍼부은 끝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어..
세상은, 사회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더라.
꼭 내가 원하는,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더라고
그것도..
엄청 꼬아서 말이지.
"여~ 도리 오늘은 얼굴 좋아 보인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그래그래 담배 폈냐?"
"하나 주시면.."
"새끼~ 가자 형이 하나 줄게."
그래도 얻은 게 전혀 없진 않았어.
몇 명 정도는 슬슬 아빠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니 말이지.
"너 아침마다 오? 불 땡큐.."
흡연실에 들어서자마자 담배를 무는
다른 팀 대리님에게 라이터로 불을 켜서
두 손으로 공손히 갖다 대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하지만 자연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대리님이었어.
"후~ 편하게 펴~ 나이차 얼마나 난다고"
"아 그럼 한대 피겠습니다."
"그래그래. 근데 너 아침마다
무슨 인사 못해서 죽은 귀신마냥
인사하고 다니는 거 안 힘드냐?"
"안 힘듭니다!"
"... 너 군대 어디 나왔냐.. 해병대?"
"육군 나왔습니다!"
"난 무슨 특전사 출신인 줄.. 왜 이렇게
군기 들어있고 난리야.."
열중쉬어 자세로 담배를 필 때만 한 손으로
담배를 빨아들이고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목소리는 크고 절도 있게.
아빠의 모습이 마치 군인처럼 보였던 걸까?
피식 웃으며 던진 농담이었지만.
아빠는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어.
"아 좀 편하게 펴 내가 불편해서 못 피겠네."
"이게 편합니다!"
"... 애가 왜 이렇게 기가 죽었냐.."
이상하지? 분명 힘 있고 큰 목소리, 그리고
나름 절도 있는 형동을 하고 있는데
그때 그 대리님은 아빠에게 분명
기가 죽어 있다는 말을 했어.
'이게 기죽은 거면.. 기 살면
지구 정복도 하겠네...'
그때 아빠는 대리님의 말을 이해하기엔
너무 세상을 모르고 너무 어렸었던 것 같아.
"어?"
담배를 다 피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아빠를 발견한
정현이가 도도도 달려오더니 아빠 앞에 우뚝
서는 거야.
"뭐.. 뭐야? 습격이냐!"
아빠를 빤히 보던 정현이.
"안녕하세요~"
자신의 배에다 두 손을 모으더니 몸을 90도로 구부리며
아빠에게 인사하더라고.
"... 넌 또 뭐 하는 거야..."
몸을 세워 아빠와 다시 눈이 마주친 정현이.
크게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어.
"아싸~ 내가 먼저 했다. 너 왜 나한텐 인사 안 하냐?
전 직원한텐 다하고 다니면서?"
"넌 친구잖아."
"아~ 잡은 물고기라 밥을 안 주시겠다?
그래봐~ 더 맛있는 밥 찾아서 도망갈 거야"
"너.. 나 없이 살 수 있어?"
"... 한번 없어져봐 봐 살 수 있나 없나 한번 보자.."
살짝 삐진 건지 척하는 건지 입을 삐죽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정현이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등을 살짝 툭
치며 말을 걸어오더라.
"니네 이제 사무실에서 사랑싸움하니...?"
"아.. 아닙니다!"
"... 왜 목소리가.. 보기 좋네.. 열심히 해봐..."
평소와 다르게 살짝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면서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민차장.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업무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어.
아빠도 슬슬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를 켰지.
"아오 탕비실 쓰레기통에 누가 자꾸 플라스틱
버리는 거야? 물질질 흘러서 치우기도 싫게"
다들 들으라는 듯이 투덜대면 지나가는 직원.
아빠는 누가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어.
"제가 치우겠습니다!"
"어? 야 고무장갑 없어."
"괜찮습니다."
"집게도 없는데..."
"지금 바로 치우겠습니다!"
"아니... 야..."
탕비실로 뛰어가던 아빠.
"야 사무실에서 뛰지 마라.. 애도 아니고.."
"네 걷겠습니다."
"아오.. 재 말투 좀 어떻게 누가 혼내봐 좀.
나 군대 PTSD 올 것 같아."
탕비실안.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플라스틱 컵, 음료수통 들을
들어 올리자 음료인지 뭔지 모를 거무튀튀한 액체가
주르를 흘러내리더라.
'으... '
절로 인상이 쓰여졌지만
'이 정도도 못하면 앞으로 사회생활 어떻게 하냐!'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고
아빠스스로를 다그치며 묵묵히 치워나갔지.
- 쏴아아.. -
결국 분리수거를 다하고는 손을 씻는데
손에 묻은 검은색 이물질 자욱이 잘 닦이지 않는 거야.
비누도 써보고 주방세제도 써봤는데도
한번 강하게 묻은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고.
결국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개발 1팀에서
팀원들끼리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라.
"하.. 봤어? 이번업데이트 DB양? 어마무시하던데?"
"난 못해요~ 그거 아니어도 할 것 겁나 많어"
"나도 못해. 연말이라고 수정요청 들어온 게
얼마나 많은데 이것만 해도 피가 마른다 피가"
"아니 다 못하면 누가 해? 좀 안된단 소리 말고
좀 긍정적으로? 어? 그렇게 안되나?"
김세찬 과장의 해고.. 관리자의 부재 때문이었을까?
업무 분배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개발 1팀이었지.
"형! 제가 해볼게요!"
팀 입구 앞에서 소리친 아빠.
그리고 일시에 '넌 또 뭐야?'라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던 개발 1팀 팀원들
"누가? 너?"
"이야.. 니가 드디어 미쳤구나?"
"아 뭐래? 누가 또 애 눈치 줬어?"
"니가 인마 아직도 우리 팀인 줄 알아?"
아빠가 걱정된 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말란 식으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좋은 기회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거 내가 해주면...'
아빠는 또 아빠 나름대로 계산된 행동이었지.
"저 지금 당장 급한 일 없어요. 제가 짬날 때마다
해놓을게요."
한참을 주네 마네, 우리가 인간이네 짐승이네 하면서
옥신각신하다 결국 디비에 입력할 자료를 받아
자리로 향했지.
"일하다 죽을 셈이야? 이제 좀 한가해졌는데 뭔 일을
사서해? 너 혹시..."
"응? 혹시?"
아빠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정현이는 아빠가 자리에
앉자마자 목소리를 줄인체 아빠에게 말을 건넸어.
"너 월급 더 준데? 인센티브 뭐 그런 거야?"
"헛소리야.."
농담이었다는 듯이 혼자 신나게 웃던 정현이.
어느새 웃음이 그치고 살짝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어.
"과유불급. 과한 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 이거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해준 얘기라 가슴에 담고
살았는데. 이제 네가 품을 때가 된 것 같아서 누나가
건네준다. 잘 품고 있어~"
"뭐래? 그리고 왜 니가 누나냐?"
"사회생활 오래 했으면 누나지?"
"야! 너 몇 월생이야? 나 4월이야"
"파일을 어디다 뒀더라... 떠들지 말고 일해..
근무 시간이야..."
팀장님처럼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아무리 친구라도 다 큰 성인 여자를 때리는 건 아니지...'
라는 생각에 자세를 고쳐 앉아 개발 1팀에서 받아온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어.
"근데.."
"아 깜짝야! 왜? 뭐? 근무시간이라며"
마치 뱀기어들어듯이 스륵 하고 자연스럽게 아빠 옆으로
다가오는 정현이.
"갈 거야?"
"어딜?"
"너 공지 안 봤구나. 우리 전 직원 회식한대잖아.
송년회. 아.. 너 아직 1년 안 됐지? 사건사고가 많아서 그런가
되게 오래된 직원 같은데.."
송년회.
그동안 해왔던 팀회식이라던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혹은 팀과 팀끼리 하는 그런 회식이 아닌 회사에 소속된 모든 직원들이
모이는 회식자리. 1년도 안된 아빠였기에 부담이 될 만도 했지만.
'이건 진짜 엄청난 기회잖아?'
아빠에겐 그런 건 없었어.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어놓을, 그리고 이미지를 쇄신시킬
둘도 없는 기회라 생각한 거지.
"가야지!"
"기분 탓인가..? 왜 좋아하는 걸로 보이지..?"
"안 좋을 건 또 뭐냐? 뭐 먹는데?"
"하아.. 몰라 이상한 한정식이야. 난 그런 게 좋은데
왜 있잖아 삼겹살이나 갈비나 고기나 고기 같은 거..."
메뉴가 맘에 들지 않는지 투덜대는 정현이었지만
아빠에게 메뉴 따윈 크게 상관이 없었어.
같이 있을 직원들, 그리고 술만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야.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벼르고 벼르던 회식날.
6시 땡치자 마자 엘리베이터로 뛰어갔어.
"쟈 배가 많이 고픈갑네.. 전화해서 먼저 꺼내주라햐~"
"야 빨리 가봐야 예약시간이 6시 30분이야."
그런 아빠를 보며 한 마디씩 하는 직원들.
하지만 그런 거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
누구보다 빨리 회식장소에 도착해야 했거든.
6시 17분 다행히 거리가 가까워 금방
도착한 회식장소.
주차를 하자마자 일단 담배부터 피기 시작했어.
폈다? 아니야 그냥 들이마셨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거야.
그렇게 담배 두 개를 들이마시고 식당 입구
출입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서있었어.
슬슬 보이는 직원들
"대리님 안녕하세요?"
"부장님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또 미친 듯이 인사하기 시작했지.
"뭐야.. 애는 회사에서도 그러더니 안녕하세요 밖에 못하는 거야?"
"우리 회사 NPC잖아요. 들어가시죠 부장님?"
"머여.. 오늘은 도리가 사는겨?"
"뭐랴? 여기 도리네 가게랴?"
비꼬는 사람도 있고.. 농담을 건네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정말 웃기고도 비참한 게 뭐였는지 아니..?
그럼 비꼬는 말투도, 농담도. 단지 그 대상이
아빠를 향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는 거란다..
다들 회식장소로 들어가고
더 이상 직원들이 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빠도 들어가려고 출입문을 열려고 하는데
유리로 된 출입문에 비치는 아빠의 모습은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고 있는
"거지네.. 누가 보면 동냥 온 줄 알겠어.
장소도 좋네 식당.."
"어? 차장님 늦으셨네요?"
"응 뭐 할 게 있어서.. 정현이는 왔니?
그나저나 요즘 거지도 잘 차려입고 다닌다는데...
가서 세수라도 하고 오지 그래?"
"넵! 먼저 들아가세요!"
"그래.. 한번 잘해봐.."
걱정되는 듯한 말투로 말을 흐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민차장.
화장실로 갈까 하다가 어차피 세수할 거
담배나 한 대 더피자 싶어 담배를 꺼내 물었지.
'후아.. 크큭..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회식이라고, 어떻게든 이미지를 바꿔 보겠다고,
어떻게든 그들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내가 처량하게 느껴지다가도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되는... 맞아
나도 내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었던 거는 분명한 것 같아.
"도리! 도리인마 이리 와 앉어"
"아.. 저는.. 오! 저쪽으로.."
"여직원 둘 앉아 있는 곳에 니가 왜 껴?
아~ 정현이? 둘이 친구지?"
회식장소에 들어서자마자 비어있는 옆자리를
팡팡 치며 아빠에게 앉으라고 소리치는 팀장님.
그곳에 앉았다간 회식 내내 부장님만 상대해야 할 것
같아서 정현이와 민차장이 앉아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가서 앉았어.
"뭔가.. 엄청난 걸 준비하는 것 같더니
정현이랑 나랑 같이 놀 거 준비한 거였어?"
"그래서 뭐 하고 놀건대?"
"뭐래? 아니에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는 민차장.
"그래? 좋다 말았네?"
한정식집하면 생각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시끌시끌하고
정신없는 분위기. 그때 평소 잘 뵐 수도 없는 이사님이
벌떡 일어나셨고 거짓말 같게도 그 시끄럽던 공간이
물이라도 끼얹은 듯 일순간에 조용해졌어.
"자 잔채워주시고~ 앞으로 살짝 내밀어주세요.
올 한 해도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누가 대본이라도 써주는 건지. 틀에 박힌 뻔한 인사말.
2분 정도 되는 이야기를 쉬지도 않고 하는데
말이라도 재밌으면 모를까.. 잔은 왜 채우고
손을 내밀라고 한 건지 신종 고문이 따로 없더라고.
"건배사 하겠습니다. 말술 먹어도 죽지 말자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차 가자
말죽거리!"
'풋'
"언니 애 봤어? 웃었어."
너무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건배사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고. 그걸 놀리는
정현이와 상에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살짝 들썩이는 민차장이었지.
"언니 울어?"
"큼.. 큼.. 으흐흐흐.. 흐하하하 "
처음 봤어. 그렇게 아이처럼 신나게 웃는 민차장의 모습 말이야.
이사님의 건배사로 전 직원회식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분위기를 봤을 때 오늘 이 회식의 흐름은 나를 위해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충분하다 생각되는 게
자신감이 막 차오르기 시작했지.
그래서 뭐 대단한 걸 했냐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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