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1976년 8월 5일, 에릭 클랩튼의 인종차별 사건
[시리즈] 장면 일기
· 1976년 7월 4일 & 5일: 펑크의 역사가 바뀐 날(상)
· 1976년 7월 4일 & 5일, 펑크의 역사가 바뀐 날(하)
· 1987년 7월 넷째주, 빌리조엘 소련에 가다
· 1998년 2월 9일, 첨바왐바의 물벼락 퍼포먼스
필자는 근래 해외 뉴스 중 꽤 충격적인 결과를 보았는데, 이른바 브렉시트당이라고 불리는 극우 정당 개혁 영국이 2026년 5월 7일 영국 지방선거에서 가장 많은 지방 의회 의석을 확보하며(1453석, 약 30%) 지선 1위를 해버린 것.
영국 노동당은 역사적인 참패를 거두고, 키어 스타머 총리는 사임의사를 밝혔다. 더 충격적인 것은 보수당은 약 17%를 획득하며 제 1 야당 자리까지 위협받았고. 이를 통해 개혁 영국은 반짝 인기라기엔 안정적인 의정활동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개혁 영국이 이 자리까지 올라온 가장 상징같은 인물을 뽑으라 하면, 국제 정치에 관심있는 포붕이들이라면 무조건 들어봤을만한 나이젤 패라지라는 양반이 있다.
이 작자가 누구냐 함은, 원래는 UKIP 이라는, 매우 브렉시트에 적극적이던 정당 출신인데, 브렉시트를 이끌고 이민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며 이쪽 계열에서는 빠지지 않는 사람.
당연히 반대도 많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호의적으로 보는 여론은 27%,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여론은 66% 정도 된다.
그런데, 1970년대에도 패라지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는 강성 우파 쪽에서는 매우 거물인 정치인이 있었다. 바로 에녹 파월(이넉 파월이라고도 한다) 이라는 사람.
에녹 파월은 원래는 그리스어를 연구하던 당대 문헌연구계 최고 천재로 불린 교수 출신으로, 1940년대 후반 보수당으로 정치에 입문해 1950년 의원 당선, 1960년 해럴드 맥밀런 총리의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커리어를 발판삼아 1965년 사실상 차기 총리감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당대표 선거에 나갔다가 3위로 낙선했다만, 그를 이기고 야당 대표가 된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어 입지를 유지했다.
이렇게 나름대로 당내에서 유망한 차기 총리감이었던 그는 사실상 정치적 자ㅅ이나 다름없는 끔찍한 연설을 감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1968년 피의 강 연설이다.
(윈드러시 세대)
(1958년 노팅힐 폭동)
피의 강 연설을 보기 위해선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1958년 8월부터 9월까지 영국 서부 노팅 힐 지역에선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대규모 인종 공격 폭동인 노팅힐 폭동이 발생했다.
2차 세계 대전을 기하여 집값이 쌌던 노팅힐 지역으로 이민 온 카리브해쪽 노동자들(윈드러시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후일 펑크에서 레게와 덥 사운드가 추가되는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을 향해 박탈감과 공포를 느낀 극우 청년들은, 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이민자들과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습격 하고 방화를 저질렀다.
또 1963년에는 "영국판 로자 파크스 사건" 이라 불리는 브리스톨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져, "유색인종은 버스 운전사나 안내원으로 고용하지 않는다" 는 비밀조항을 향해 단체 시위를 벌였다.
이 두가지 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1965년 영국 최초의 차별금지법인 "인종관계법" 으로, 현 영국 좌파들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토니 벤 과 같은 거물 정치인들을 일으켜 만들어졌다.
그런데 첫번째 제정때에는 부족한 부분이, 가장 차별이 극심하던 펍, 호텔, 대중교통 등에서만 차별을 금하고 본질적으로 고용에 있어서의 평등 조항은 미비했다.
실제로 1967년 당시 조사에 따르면, 돈을 벌려고 온 이민자들은 80%가 취업과 임대에 있어 노골적 차별을 받고있었다.
그리하여 1968년, 68혁명이 한창일 즈음, 인종주의 반대와 소수자 인권 보호 어젠다를 공유하던 신좌파 학생운동권과 청년 지식인층은 법의 이 허점을 지적하였다.
이 시점이면 부모를 따라 영국에 왔던 아이들이 이제 막 성인이 되기 시작했을 때고, 당연히 교육에 있어서 극심한 차별을 겪은 세대였다.
따라서 개정된 2차 인종관계법에서는 피부색을 이유로 채용 차별과 주택 차별 금지, 금융 서비스 이용 확대, 차별 민원 기구인 인종관계위원회의 권한 강화가 이루어졌다.
에녹 파월은 이 개정된 인종관계법을 두고, 특정 인종을 차별할 권리도 시민의 자유다, 이민자를 보호하는 것은 백인들을 향한 역차별이다, 위대한 대영제국의 백인 정체성이 무너진다와 같은 전형적인 논란적인 레토릭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연설을 한다.
이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민자들이 집을 구할 수 없고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상황을 두고 "자유" 로 하여 국가 차원에서 방치를 하는 것은 사실상 강자의 폭력의 묵인이자, 생존의 자유보다 차별의 자유를 우위로 보는 셈이었다.
게다가 인도적인 이유를 배제하고도, 윈드러시 세대는 야반도주하듯 영국으로 온 불법 체류자들이 아니라 세금도 영국 백인들과 똑같이 내는 합법적인 시민이었다.
이때 에녹 파월이 한 논란의 연설은, 그가 (고대 문헌 학자였던 경력을 살려) 연설 중 피의 강(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했던, 외래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이 참혹한 전쟁을 벌여 테베레 강이 피로 물들었다는 내용)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에
피의 강 연설으로 더 자주 불린다. 아래는 꺼무위키서 퍼온, 그 연설의 일부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w4vMZDItQo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그들이 결코 동의하지 않은 기본적 결정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내가 출산할 때도 병원 침대를 얻을 수 없고, 아이들은 학교 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그들의 집과 주변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전망은 좌절되었습니다.
직장에서 그들은 고용주가 이민 노동자에게 원주민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규율과 역량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주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이 따라 자신들이 이제 원치 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말을 점점 더 많이 듣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법에 따라 일방적 특권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작용할 수 없고, 그럴 의도도 없는 법률이, 낯선 사람, 불만을 품은 사람, 선동가에게 그들의 사적 행동을 비난할 권한을 주기 위해 제정되어야 합니다."
(이언 맥클라우드)
보수당 내 온건 소장파들은 파월의 연설을 듣고 당연히 충격을 받고, 그를 국방장관에서 해임하지 않으면 집단 사퇴하겠다고 압박을 보냈다.
특히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평화로운 독립을 도왔던, 보수당 내 온건파의 수장 이언 맥클라우드 의원은, 파월이 저 연설을 하고나서 사석과 공석을 막론하고 아예 그를 무시하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후일 총리가 되는 매거릿 대처는 이후의 강경한 성향을 보면 느껴지듯이, 그의 수사는 문제로 보았으면서도 문제 제기 자체는 타당하다며, 이후에도 한번도 그 의견을 꺾지 않았다.
파월이 결국 해임되자 대처를 포함한 당내 강경파들은 파월의 복권을 주장하는 소동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인종차별 정당 이미지를 빠르게 절연시키는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설문 조사. 1번 문항에서 에녹 파월의 이민관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전체로 보면 동의 67%, 반대 19% 를 점하고 있으며, 히스가 그를 자른 것에 대해선 25%가 옳았다, 61%가 틀렸다고 답하고 있다)
그러나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연설 직후 실시된 갤럽 조사에 따르면 영국 국민의 67%가 파월에 동의했으며, 반대 의견은 19%에 불과했다.
이 여론의 대부분은 당연히 백인 블루칼라 노동 계층이 경기 침체, 주택 부족에 대한 불만이 노동자들을 향한 분노로 치환되었기 때문이겠다. 실제로 런던 동부의 부두 노동자들과 고기 시장 상인들 1000명은 얼마 후 파월의 복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대처 총리가 1979년 당선되었을 때 했던 연설 또한 "영국이 다른 문화의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혹자는 1968년 그 격동기에 저렇게까지 국민 여론이 나올 수가 있나? 싶을 수 있는데, 실제로 68혁명이 성공한 곳은 역사적으로 독일과 칠레 뿐이라는 걸 고려하면... 기성세대 + 침묵하는 다수의 여전히 보수적인 여론이 훨씬 강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파월은 이후 어떻게 되었나, 그는 히스 총리가 ECC(현 EU의 전신) 가입을 강력히 추진하자, 영국 주권을 유럽에 팔아넘길 수 없다며 보수당을 탈당하고 아예 노동당 지지까지 잠시 한다.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친영 우익 정당인 얼스터 연합당에 1974년 입당, 13년동안 활동하며 영국의 EU 활동을 사사건건 비판했고 1987년 낙선할때까지 하원의원 자리를 지킨다.
https://www.youtube.com/watch?v=qbXSswlt5qo
본론으로 들어가자. 에릭 클랩튼은 1976년 8월 5일 버밍엄의 오디온 극장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에녹 파월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연호하고 "그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를 지지해야 한다. 그가 총리가 되어야하고 영국이 점령당하는 것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이다." 고 칭송했다.
1976년이면 사실 이미 에녹 파월은 보수당에서 쫓겨나 변두리 정치에 머물던 상태였을테다.
그럼에도, 노동당과 보수당이 말하지 못하던 이민 문제를 처음으로 건드렸다는, 그 상징성 때문에, 여전히 국민들에겐 아이코닉한 인물로 다뤄지고 있었다.
또 1967년 창당된 군소 파시즘 정당 영국 국민 전선은 1970년대 초 영국의 경제파탄(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해 초래된 엄청난 스태그플레이션, 그로 인한 국가 부도 위기)과 우간다 아시아계 이민자 대거 유입(1972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명령한, 아시아인 전원 추방 명령)으로 인해 추진력을 크게 얻고있었고,
이 영국 국민 전선이 가장 상징처럼 모시던 정치인이 바로 에녹 파월이었기에, 에녹 파월의 이름은 계속해서 영국에 울려 퍼질 수 있었다.
클랩튼은 이 국민 전선이 슬로건으로 밀던 "Keep Britain White!" 를 외치며 영국을 백인들을 위한 나라라고 인종차별적 메시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관객들을 향해, 이곳에 만약 유색인종 외국인이 있다면, 당장 나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클랩튼은 왜 그랬던 걸까. 가장 크게 인정되는 "변명" 은, 그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독한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있었다는 것.
1970년대 초반 클랩튼은 그 강하다는 헤로인을 끊고 나서 대신 술과 코카인에 빠져서는, 하루 일과는 매일 스페인산 브랜디를 두 세병씩 마시고 시작하고, 수천만원을 코카인을 사는데에 태웠다.
코카인이랑 술만 주구장창 마시는데 피해망상, 분노 조절 장애, 편집증같은 정신병이 안 올 수가 없었고, "유색인종이 영국을 집어삼킨다" 같은 음모론적 서사에 쉽게 꽂힐 수 밖에 없었다.
연주 중단이 틈만 나면 일어났고 관객들이랑 싸우고, 무대 위에서 쓰러지고... 실제로 클랩튼 본인도 1970년대 초중반의 기억은 아예 증발해버렸다고 고백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L0xLLPJ0bOw
미국 럿거스 대학교 연구진은 이때 클랩튼 심리를 가지고 논문까지 썼는데(...) 일부를 발췌하면 꽤 흥미로운 해석이긴 하다:
클랩튼은 블루스 가수로써, 당연히 어린 시절부터 머디 워터스, 로버트 존슨 같은 흑인 블루스 장인들을 동경하면서 커왔다.
그는 흑인들의 삶과 음악에서 나오는 날것의 생명력, 슬픔, 그리고 진정성을 동경했으나, 전후 영국의 평범하고 지루한 중산층 백인 가정에서 자란 자신에게는 그런 깊은 예술적 소울이 없다는, 일종의 문화적 결핍감과 열등감에 평생 시달려왔다.
그래서 흑인 음악을 완벽하게 복제하고 싶어 했지만, 자신은 그들의 고통과 역사에 가닿을 수 없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흑인의 차별과 억압의 역사속에 탄생한 블루스를, 소울 없이 겉으로만 배껴와, 세계적인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영국 백인 록스타들이 가난한 흑인들의 음악을 훔쳐다가 장사한다는 비판에 있어 클랩튼의 무의식 속에는 아무리 성공해도 자신의 인종에 대한 깊은 열등감이 있었을 것이고, 말은 그렇게 거칠게 했어도 거대한 죄책감과 방어기제가 숨어있었을 거란거. 그리고 그게 술과 마약으로 트리거가 되어 은연에서 밖으로 뱉어져 나온 것.
상당히 설득력 있긴 하다. 어떻게든 모순을 해결하려다가, 방어기제가 공격성으로 뒤틀려서 "비록 흑인 음악으로 돈을 벌고 있지만, 내 피와 영혼은 영국의 순수한 백인 민족주의자다" 라는 이상한 방식으로 표출되었을 수도 있으니.
실제로 1974년에는 밥 말리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 이 빌보드 1위까지 찍었으니, 가장 거대한 모순에 마주한 순간이었을테다.
(1976년 패티 보이드 & 클랩튼. 패티 보이드 존나 이쁘긴 하다..)
클랩튼은 사건 후부터 수십년동안 거듭 해명을 했다. 1970년대 내내 클랩튼에게 저 발언 꼬리표가 따라다니자, 그는 처음에는 그저 농담이었다고, 정말 인종차별주의자면 밥 말리의 음악은 어떻게 불렀겠냐고 능청스레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1980년대가 되었을 땐, 알코올과 코카인으로 인한 망가진 상태였어서 술김에 그랬다며, 개인적 분노가 혐오로 번진 것 같다며 이야기한다.
2000년대에는 패티 보이드에 추근덕댄 아랍인 사업가 이야기도 꺼내기도 한다. 그 8월 5일 발언이 있기 몇시간 전, 클랩튼과 패티 보이드, 그 일행은 런던의 처칠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아랍의 부유한 사업가가 패티 보이드한테 성적 추파를 던졌다고 한다.
클랩튼은 이거 보고 빡쳐서 콘서트에서 그랬다고 2007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또 무슨 말을 했는지도 녹음본을 듣고서야 알게되었다며 자신이 바보같았다고 인정하고 거듭 사과의사를 보인다.
(헨드릭스와 함께. 1967년 즈음)
그가 했던 변명 중 "흑인 친구들도 있고, 흑인 여자와 사귄 적도 있다" 는 건 이해가 가긴 한다.
일단 지미 헨드릭스와의 우정은 유명한 이야기. 특히 지미 헨드릭스가 죽었던 날, 클랩튼은 그에게 희귀한 왼손잡이용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를 선물하러 가는 중이었지만, 그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다음 날 아침 그의 비보가 들려왔다.
그가 죽었을 때, 클랩튼은 "인생의 반쪽을 잃었다" 며 방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고, 헤로인에 한때 크게 중독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UU1GLMdnkM
(네이선 이스트와 함께. 영감탱 둘이서 셀카 각도가 귀엽다)
그리고 그의 든든한 음악적 파트너이자 흑인 베이시스트였던 네이선 이스트는, 애초 클랩튼의 그 발언이 있은 이후에 만난 관계다.
네이선 이스트도 누구보다 그 발언에 대해서 잘 알고있었겠지만, 그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던 클랩튼의 모습이 아닌, 제정신을 차리고 진심으로 참회하며 음악에 몰두하는 인간으로서의 에릭 클랩튼의 진정성을 더 본 것 같다.
클랩튼이 아들을 잃고 만든 "Tears in Heaven" 의 서정적 베이스 또한 네이선 이스트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VcaWuY4YcH8
(그의 우상 비비킹과 함께)
2000년엔 "용서" 로 받아들여지는 비비킹과의 합작 "Riding With the King" 앨범도 있었다.
클랩튼은 과오의 대한 속죄와 우상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앨범커버서도 그를 모시는 운전기사처럼 연출한다. 대인배 비비킹은 합작 앨범 발매 후 인터뷰에서 세간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좋았어요. 그 젊은 친구 말이죠. (웃으며) 이름은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죠. 정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사실 나는 그를 천재라고 불러요. 내 친구, 에릭 클랩튼. 정말 멋진 사람이죠. 앨범 제목을 Riding with the King으로 짓자고 한 것도 에릭이었어요.
나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죠. 곡도 전부 그가 골랐거든요. 처음 함께 작업할 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곡은 자네가 골라.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곡이 있거나 내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하는 곡이 나오면 그때 얘기하자.
그런데 그가 내가 이미 잊고 있던 곡들까지 가져왔어요. 심지어 내가 직접 쓴 곡인데도 잊고 있었던 것들 말이에요. 정말 그 사람은 천재예요. 대단한 사람이죠."
(레드 손더스)
사진작가이자 음악계 활동가였던 레드 손더스는 클랩튼의 발언 이후 음악 언론에 공개 서신을 보냈다.
그는 대략 흑인 음악을 거의 전부 베껴 경력을 만든 사람이 어떻게 파월을 지지할 수 있느냐, 우리는 인종주의에 맞서는 음악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취지로 클랩튼에 따졌고, 이 서신에 많은 음악계 사람들이 호응하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줄여서 RAR 운동이 촉발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RAR 운동의 주요 조직자들 명단을 찾아본 바로 느낀건, 레드 손더스같은 사진 작가부터 시작해 타이포그래퍼, 좌파 연극 활동가, 잡지 편집자 등이 힘을 보탰었더라, 딱 음악계 전반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위 사진들은 모두 레드 손더스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다)
RAR의 가장 중요한 미학적, 정치적 전략은 펑크와 레게의 융합이었다.
사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영국의 경제 상황이 워낙에 파탄이었기에 가난한 백인 펑크 청년들과 카리브해 이민자 흑인 레게 청년들은 저렴한 슬럼가 동네를 공유하며 자주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기성세대의 문화를 혐오하고 경찰의 과잉 진압을 비판적으로 보는 정서적 공감대도 이미 형성되어 있긴 했다.
돈 레츠같은 초기 덥 전설들은 이미 여러 펑크 클럽에서 레게와 덥 음악을 디제잉 했고, 펑크와의 융합도 이미 활발히 있긴 했다. 그럼 RAR 운동이 포착한 역할은, 이러한 흑백 융합의 증폭제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WiSqeCnnVA
가장 대표적인 저항자는 클래시였다. 그들은 영국으로 넘어온 자메이카 음악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Sandinista" 앨범에서는 스트러머가 직접 레게의 미키 드레드를 초청해 프로듀싱, 믹싱 아이디어에 도움을 받았다. 아예 1982년에는 미키 드레드와 함께 월드투어까지 함께 돌았다.
또, 초장에 말한 1958년 노팅힐 폭동 이후 영국엔 노팅힐 카니발이라는, 반인종차별 메세지를 전하는 축제가 매년 열였는데, 클래시는 노팅힐 카니발 도중 경찰과 흑인 청년들의 충돌을 보고 곡을 썼고 그게 가장 대표곡 중 하나인 "White Riot" 이다.
여기서 White Riot(백인 폭도) 는 백인 우월주의 진영에서 오독하여 오용하기도 했지만, 원래는 "흑인 청년들은 부당함에 저항하는데, 왜 백인 노동 계층은 순응하는가" 하는 의식에서 촉발되었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gqH_0LPVoho
https://www.youtube.com/watch?v=jqZ8428GSrI
https://www.youtube.com/watch?v=gLIfB7nqgG0
윈드러시 이민자 2세대 청년들이 만든 레게 밴드 스틸 펄스는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 가 되고 싶었다고 가디언지 인터뷰에서 회고한다.
그들은 KKK 전 지도자인 데이비드 듀크가 국민전선에 조언하려고 했던 보도와, 멤버 데이비드 헤인즈가 실제로 백인들에게 쫓겼던 경험을 토대로 "Ku Klux Klan" 과 같은 곡으로 인종차별을 비판한다.
더 스페셜즈는 더 노골적으로, 제목부터 "Racist Friend" 처럼 인종차별하는 친구들을 끊어버려라, 흑인 멤버 린벌 골딩이 폭행당한 경험을 토대로 만든 "Why" 같은 곡을 연주했다.
스페셜즈의 리더 제리 다머스가 설립한 "투 톤 레코즈" 는 말그대로 흑과 백이 조화를 은유했으며, 앨범 커버부터 포스터, 로고 모두 체크무늬를 위주로 사용했다.
이러한 투톤 문화는 스카와 펑크가 활발하게 결합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스카펑크의 시조라고 불리며, 스페셜즈의 "Ghost Town" 은 기어이 영국 차트 1위를 거머쥐고 3주동안 머물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JOS-8MlVl4I
https://www.youtube.com/watch?v=-ShU5UPQ7Cs
https://www.youtube.com/watch?v=on6DxBgfsDY
단순히 클랩튼의 인종차별 발언에 항의하는 취지로 시작된 RAR은 점점 그 규모가 확장되어 여러 소수자 인권운동과도 결합한다.
엑스레이 스펙스의 보컬 폴리 스타이린은 소말리아계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페.미니즘과 소비자본주의를 공격했으며,
톰 로빈슨은 퀴어 운동과 결합하여 영국 경찰과 언론 권력의 성소수자 탄압을 공격한다.
종교적인 비판까지 나왔는데, 스티프 리틀 핑거즈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이라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 개신교 종파 갈등을 지적했으며, 이와 같은 종파갈등과 인종차별은 같은 선상이라고 외쳤다.
(클래시의 전설적인 RAR White Riot 무대)
(대중들을 향해 RAR 구호를 외치는 톰 로빈슨)
(열광하는 당시 흑인 관객들)
https://www.youtube.com/watch?v=fqtEl5_JwNU
이러한 흐름은 1978년 4월 30일 빅토리아 파크에서 열린 첫 RAR 콘서트, 이른바 "나치에 반대하는 카니발(Carnival Against the Nazis)" 로 그 결실을 맺는다.
무려 10만명이 모인 이 콘서트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극우세력의 본거지였던 동부 슬럼가까지 10km를 인종차별 반대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행사를 동반했으며, 앞서 말한 밴드들 대다수가 참여해 공연했다.
하이라이트는 클래시의 "White Riot" 무대였다. 클랩튼의 발언 이후 500회 이상의 풀뿌리 펑크 공연과 다섯번의 카니발을 열었던 RAR 운동은 1981년 7월 4일 카니발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마지막 공연에서 1만 7천여명의 청년들은 대규모 평화행진을 벌였고, 더 스페셜스는 이 무대를 마지막으로 원년 멤버 체제는 해체한다.
(1979년 영국 총선 결과. 끝에서 두번째에 NF가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인원이 많이 동원되었으니 당연히 정치적 효과도 톡톡히 봤을테다. NF는 RAR 운동 때문에 거의 몰락해버렸다.
여느 극단주의 정당들이 그렇듯 NF가 타겟팅 하던 정치적 포섭 전술은 가난한 하층민 백인 청년들의 분노를 유발해 길거리 네오나치 폭력부대로 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당시 청년들이 가장 열광하던 펑크록에서 그런 극우 행동 대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문화적 제스쳐를 취하다보니 그들에게 유행을 따라 "힙하다" 고 느껴지는 건 펑크 어젠다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RAR은 단순히 음악인들이 조직한 게 아니라, 좌파 정당들과 노조, 시민단체들이 연합한 반나치 동맹 네트워크도 탄탄히 뒷배가 있었고, NF가 추악한 나치 파시스트 집단임을 공고히 낙인 찍을 수 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대처의 등장도 있었다. 대처는 보다 온건한 어투로 NF에 이끌리던 백인 청년들을 자기 진영으로 데려오고자 했고, 이가 성공하여 NF는 제도권 정치에 밀려 1979년 영국 총선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하고 득표율 0.6%라는 성적표를 거둔다.
요컨대, 클랩튼이 단순히 취해 했던 실언 하나가, 나비효과로 번져, 역설적이게도 영국 청년들은 혐오를 부수고 다문화주의라는 영국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fin.
(클랩튼, 워터스, 엔트위슬)
ps. 이런거 보면 참 클랩튼이랑 워터스랑 친한게 신기하기도 하다. 극과 극은 통하는건가... 서로 정치색은 아예 안보고 만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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