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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역대 최초로 대기록을 세운 풍운아에 대해 알아보자

ㅎㅎ(203.112)· 2026.07.23 14:00· 조회 1902
[시리즈] 간단 경마글 시릐즈 · 북한 땅에서 죽은걸로 추정되는 중상 우승마가 있다 · G1 경주 최다 착차 기록과 말들에 대해 알아보자 · 더비 기념 실장 전 더비마들의 이모저모를 알아보자 · 말도 안되는 이유로 현창마가 못 된 명마를 알아보자 · '영웅' 이전에 '약'한 말에 대해 알아보자 · 가장 빠르고, 운이 좋고, 강해야 우승하는 레이스 우승마 모음 · 타마모 크로스의 동기들은 왜 신데그레에 별로 안 나올까 · 심볼리 목장의 흥망성쇠에 대해 알아보자 · 3관마가 되지 못한 클래식 2관마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 고마 G1 연패마들을 알아보자 · 사쿠라 커머스의 흥망성쇠에 대해 알아보자 · JRA 특별상 수상마들에 대해 알아보자 · 타케 유타카 이전 최고의 천재 기수에 대해 알아보자 · 영원히 깨지지 않을것 같은 불멸의 기록들을 알아보자 · 사행과 강착 제도에 대해 알아보자 · G1 경주별 최고 단승 배당에 대해 알아보자 · 아리마 기념에 대해 알아보자 · 일본 경마 최초의 스타 기수에 대해 알아보자 · 일본 경마 역사상 최고의 3강에 대해 알아보자 · SS 이전의 중앙 경마 최고의 종마에 대해 알아보자 · 절망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준 말에 대해 알아보자 · 사츠키상에 대해 알아보자 · 8대경주 역사상 최고의 역배를 터트린 말은 누굴까? · 유일무이한 업적에도 현창마 근처에도 못간 말에 대해 알아보자 · 오심으로 중상 우승마가 뒤바뀐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 일본 경마계를 영원히 바꾼 승부 조작에 대해 알아보자 (기록하면 떠오르는 분) 기수가 세울수 있는 기록들은 많긴 하지만 그 중 완전제페 기록은 수많은 기수들 중 열댓명만 기록할 정도로 희귀한 기록이다. 8대 경주 완전 제패나 클래식 경주 완전 제패 등 엄청난 기록들은 수두룩 하지만, 그 중 달성하기 어려운 기록을 꼽으라면 '전 10장 중상 제패' 가 있다. (예시로 중상 165승인 오카베 유기오와 중상 160승의 후쿠나가 유이치는 후쿠시마 개최의 중상 우승 기록이 없다) 보통 돈을 많이 주거나 위상이 높은 중상은 도쿄, 한신, 교토, 나카야마에서 열리고, 특히 홋카이도는 하계를 제외하면 중상 경주가 열리지 않기에 중상을 100승을 이상 우승한 기수들도 달성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대부분 30~40대에나 달성한 기록을 20대에 달성한 타케옹...) 물론 경마계의 GOAT인 타케옹은 역대 최연소인 28세 4개월, 1997년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를 아그네스 월드로 우승하면서 이 기록을 달성했다. 다만 1년 차이로 최초로 이 기록을 달성하는 것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최초로 이 기록을 달성한것은 누군가 하면, 바로 야스다 토미오라는 기수로, 놀랍게도 이 기록을 달성한 다른 기수들과는 달리 중상 38승에 G1급 우승 2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다른 기수들에 비하면 초라한 기록을 가진 기수였다. (일본은 신토와 불교에서 파생된 종교가 꽤 있는데, 천리교와 창가학회도 그 중 하나다) 1947년 10월 7일, 3남 1녀의 네 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야스다 야스오는 노점상을 하는 양철공이였고, 어머니인 우메요는 평범한 주부였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이라면, 아버지는 천리교 신자였고, 어머니는 창가학회 신자였기에, 평소에도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면서 자란다. 기수 치고는 특이하게도 집안이 경마와 관련이 없었고, 특히나 아버지가 경마로 재산을 탕진했기에, 야스다는 어릴때 부터 경마가 어떤 것인지도 알라하지 않았고, 이후 후나바시 시립의 후나바시 초등하교를 재학하지만, 구구단을 7단부터 못 외우는 등,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 '그냥 하루하루를 되는대로 즐겁게 살면 된다' 라는 생각으로 살게된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는 수업을 땡땡이치고 고철 조각을 고물상에 팔거나 친구 셋과 함께 딸기밭의 딸기를 모두 서리하는 등의 말썽을 부리는 등의 행동을 하다.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공짜로 들어가 놀기 위해, 경비가 허술한 바닷가 쪽 울타리 근처를 배회했는데, 그 근처에는 후나바시의 여러 마구간이 모여있어, 그곳에서 알게된 한 마부가 야스다의 작은 체격을 보고, 기수가 될 것을 권유한다. 당시 후나바시에서 조교사로 일하던 초대 일본 더비를 제패한 기수, 하코다테 마고사쿠의 눈에도 띄어져, 그가 직접 야스다의 집까지 찾아가 야스다를 스카우트 했고, 학교 보다는 재미있을것 같다 생각한 야스다는 하코다테의 마구간에서 일하기 시작하나,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는 생활에 싫증을 내어, 일주일만에 그만두게 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후, 근처 정육점 주인과 목욕탕에 갔는데, 목욕탕 주인의 '기수가 될꺼면 지방보다 중앙 경마가 더 낫다' 라고 조언해주었기에, 야스다는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 어머니는 장남 요시히코를 기수로 키울려 했으나, 요시히코는 운동신경이 뛰어났지만, 동물을 싫어했기에 야스다를 기수로 키우기로 한다. (가토 야사지로는 훗날 아이네스 후진과 오프사이드 트랩의 조교사가 되는 가토 슈리의 아버지) 이웃에 살던 마주의 소개와 창가학회의 신자인 어머니의 연줄로 나카야마 경마장의 가토 야사지로의 마구간에서 숙식하며 일하기 시작한다. 이후 후나바시 시립 가츠시카 중학교로 진학, 아침 저녁으로 마구간의 일을 하며 중학교 생활을 했기에,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하게 된다. 후나바시에서 잠시 일할때와는 달리 학교를 오가며 생활하는 힘든 생활을 했지만, 야스다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힘든 생활도 견딜 수 있었다' 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비록 수업을 많이 빼먹었지만 어떻게든 졸업을 한 뒤, 1963년 4월 바지공원 기수양성 장기과정 제 14기생으로 입소한다. 신장 115cm, 체중 28kg라는 동기들 중에서도 더욱 왜소한 체격으로 입소한 야스다는, 로마자도 읽지 못하고 구구단도 제대로 못했기에, 입소과정 수학과정에서 나온 일차방정식 문제를 보고 '이게 대체 뭐지, 처음 보는 건데' 라고 생각하며 연필을 굴려 답을 적는다. 결과는 0점. (이후로도 아사지로와 아들 슈스케 부자에게 질릴 정도로 맞았지만, 그럼에도 일을 자주 빼먹고 노는 데 푹 빠져있었다) 다행히 국어와 사회성적은 좋았기에, 수업을 들을수는 있었다. 수업을 들을 때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혀졌지만, 야스다는 늘 책상을 베개 삼아 코를 골며 잠을 잤다. 그러다 학부모 참관일에는 조교사 가토 아사지로의 아들인 가토 슈스케가 보호자 대신 학교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평소 같으면 사회 교사가 깨워 주었겠지만, 그날만큼은 끝까지 깨우지 않았고. 수업이 끝난 뒤 교사가 "밖에 가토 선생님이 와 계시니 나가 보라"고 했고, 복도로 나간 야스다는 수업때 잠만 자는 것을 보고 분노한 슈스케에게 얻어맞는다. 당시에는 경마가 크게 번성하던 시절이였기에, 담당 교관 중에는 승마 올림픽 국가대표 후보도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 기승 실기와 말 손질 방법, 마구간 업무 전반을 배우면서 성장한 야스다는 동기인 코지마 후토시, 타지마 요시야스, 메노 데츠야, 이케가미 마사히로, 히라이 유지, 코야나기 요시하루 등과 기수로써 성장하게 된다. (훗날 14기생들은 한 기수인 아래인 후쿠나가 요이치, 시바타 마사토, 오카베 유키오, 이토 마사노리의 꽃의 15기와 비교해 본인들을 엉뚱한 14기로 부르게 된다) 다만 한 기수 아래인 15기가 엘리트와 스타 모범생이 모여있던 것과는 달리, 14기는 장난기 많고 개성 강한 인물들만 있었고, 특히 야스다는 마구간 실습때는 구슬땀을 흘리며 수업을 받는것 과는 달리, 이론 수업은 성실하게 듣지 않고, 기본적인 기승 자세는 익혔지만, 말을 완전히 자유롭게 다룰 정도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며, 거기에 체격이 너무 왜소했기에 두 차례 유급을 당한다. 그 사이 코지마와 타지마는 기수 면허를 취득했고, 야스다가 기수 면허를 취득한 이후에는 이케가미가 1967년에, 히라이가 1969년에 기수로 데뷔한다. (마츠야마 기치사부로는 훗날 스타 로츠, 몬테 프린스, 다이나 걸리버 등을 조교한 인물) 그렇게 1968년 본격적으로 데뷔한 야스다는 데뷔 첫 해에는 14승, 이듬해에는 26승을 거두면 순조로운 기수 생활을 시작한다. 노히라 유지의 몽키 기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해 기승을 이어가는 야스다를 보고 관계자들은 '출발이 빠르고 말을 잘 몰며, 페이스 판단도 뛰어나다' 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도쿄의 조교사 마츠야마 기치사부로에게 데뷔전을 치르는 아랍 종 경주마의 기승을 의뢰받는다. (니혼야나기 토시오는 1955년 오토키츠로 더비를 우승한 기수로, 조교사로도 시리우스 심볼리, 엠버 샤다이, 호요 보이 등을 조교한 인물) 레이스를 선두를 지키며 우승한 야스다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오지만, 그런 야스다에게 마츠야마는 '왜 도주하듯 선행해서 그대로 이겨버렸냐!' 라며 호통을 받는다. 혼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야스다는 니혼야나기 토시오에게 이유를 묻는다. 이에 니혼야나기가 '말의 여력을 아끼면서 승리하면, 말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라는 말을 해주자, 이에 야스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데뷔 성적에 자만한 야스오는 1970년부터 4년동안 한 자리수 승수에 그치며 부진에 빠졌고, 이에 기승 의뢰도 308회에서 67회, 70회 까지 감소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진에도 경마에 흥미를 잃지는 않았는데, 무려 첫 기승때부터 본인을 응원하는 젊은 여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경마회에서 혼날 정도로, 술과 여자에 빠져있었기 때문. 신인 시절부터 밤거리에서 유명해진 야스다는 숙소로 사용하던 마구간 방에서 여자들을 불러들이기도 해서 조교사에게 '마구간에 여자들 재우지 마라' 라고 경고를 받았고, 지방 개최에 원정을 갈때는 장기 체류도 허락받지 못한다. 거기에 밤새 술을 마신 뒤 새벽 조교 도중 말 위에서 조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이토 타케오는 키타노 오, 다이고 호마레, 가넷 등을 기승해, 8대 경주만 8번 우승한 명기수) 그러던 어느날, 이토 다케오의 마구간의 마부와 결혼한 누나를 찾아갔다가, 미용사로 일하던 여동생 구미코와 가까워진다. 그러다 야스다는 구미코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보니 미용실 기숙사의 통금 시간이 지나버렸고, 두 사람은 밤을 새워 이야기만 나누었다. 야스다는 구미코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서 였는지, 둘 사이에 부적절한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가토 슈스케에게 들켜 버렸고, 야스다는 슈스케에게 심하게 얻어맞는다. 얻어맞은 뒤, 그날 예정되어 있던 오전 경주에 출주했지만, 경기 중 낙마를 해, 목에 부상을 입은 야스다를, 구미코는 여러차례 병문안을 와 간호해줬고, 어쩌다보니 구미코가 본가로도 오게 된다. 그러나 야스다는 속으로 어머니가 창가학회의 열성적인 신자이니 싫어서라도 나를 떠날꺼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구미코는 야스다의 어머니의 제안으로 창가학회에 입교했고, 결국 결혼식은 올리지 않지만, 21세의 야스다와 16세의 구미코는 그렇게 결혼하게 된다. (이전까지 야스다는 어머니와 같이 창가학회를 믿던 두 살 어린 동생이 철도 사고로 죽었기에, 반감심이 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이러한 생각이 사라진다) 그러나 야스다는 방탕한 생활로 인해 빚까지 지었던 상황, 빚 독촉이 일터까지 찾아오는가 하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살림살이를 팔아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진다. 이에 불안감에 시달리던 그는 "엉망인 내 삶에 무엇인가 규율을 줄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창가학회 신앙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교 경전의 한자를 제대로 읽지 못해 내용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1973년에는 장남 히데오가 태어나 아버지가 된 야스다는 이전까지 병행하던 장애물 경마를 포기하고 평지 경마에 전념하기 시작, 1974년에는 14승을 거두며 데뷔때와 같은 승수를 거두고, 부활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노보루 토코를 기승한 야스다는 고쿠라 대상전의 전초전인 간몬교 스테이크스에서 승리를 자신하며 출전했으나, 명기수 타케 쿠니히코의 쿄에이 베스트에게 3착으로 패하게 된다. 이에 술에 취해 조정실로 찾아온 담당 마부가, '너한테는 절대 말을 맡기지 않겠다. 타고 싶으면 돈을 내라. 돈을 안 내면 절대 못 탄다' 라며 분노하지만 이에 야스다는 '스승인 가토 조교사에게 '다시 타서 만회해 보라'는 허락을 이미 받았다. 나는 반드시 탄다' 라며 대응한다. 이에 분노한 마부와 야스다가 몸싸움을 벌이자, 그 자리에 있던 마츠다 히로시가 중재를 해 큰 충돌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후 야스다는 말 수송 차량이 없어 국철 화차에 말을 실어 지방 경마장으로 이동시키던 시절에다. 야스다는 주쿄에서 고쿠라까지 노보루 토코와 동행하며 거의 모든 경주에 기승했을 뿐 아니라, 말 운동과 마구간 업무까지 직접 도맡았다. 노보루 토코가 데뷔하기 전 조련 과정부터 함께해 온 기수였고, 고쿠라 대상전 당일에도 1번 인기마로 지지를 받았다.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실패가 절대 용납되지 않는 상황. 레이스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첫 중상 우승에 성공한다. 이후 1975년의 니가타 기념에서는 4세 암말 하세마사루를 기승, 아카쿠라 특별경주에서 말의 개성을 완전히 파악한 야스다는, 오크스 우승마이자 전년도 니가타 기념 우승마인 나스노 치구사를 꺾으며 우승, 단승 배당 순위 9번마가 1번 인기마를 이기는 대파란을 일으키면서 이무렵 부터, '도둑 자키', '복병 기수' 로 불리게 된다. 그 뒤, 후쿠시마 트레이닝센터에서 본 한 마리의 말의 기승 의뢰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무산되고, 이후 그 말의 6번째 경기인 아지사이상에서 처음으로 기승, 중마장임에도 추입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 말이 큰 재목이 될꺼라 생각한 야스다는 본인 주전 기수였던 프레스 토코의 기승을 거절하면서 까지 이 말로 킷카상 출정을 결정했고, 거기에 그 말이 킷카상 출전이 확정되지도 않은 4일전에 자택에 친구와 지인을 초대해 축하 파티를 버는 등의 행위를 펼친다. 그 자리에 있던 팬이 단승 마권을 산다 하자, 복승으로 사라고 한 야스다였지만, 주변 사람들과 어머니까지 반드시 이긴다고 한 가운데, 1976년 킷카상 당일, 토쇼 보이와 텐 포인트의 마지막 클래식 대결에서, 복병마 '그랜 그래스'를 기승한 야스다는 이들을 모두 제치며 우승, 생애 유일한 팔대경주 우승이자, 교토 경마장에서 유일한 중상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야스다는 이 해, 처음으로 31승을 달성하면서 전국 18위까지 올라갔고, 이때부터 관동의 코지마 후토시와 함께 관동을 대표하는 중견급 기수가 된다. 이후 아메리카 자키 클럽 컵 또한 그린 그래스로 출전, 레코드를 세우며 압승을 거두나, 일본경제상부터 기수가 변경된다. 이를 들은 야스다는 충격을 받고, 집에 틀여박힌채 2~3일을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한 팬의 권유로 간 항공대의 체험 비행에서 지휘관의 '위에서 보면 집들은 정말 작아 보이지? 불빛이 켜져 있으니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 집들 안에서 모두가 각자의 고생을 안고 살아가고 있어' 라는 말을 듣고, '그러네. 다들 이렇게 힘든 삶을 견디면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나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후 일본경제상에서 카슈 치카라를 기승한 야스다는 그린 그래스에 대한 분노로 인해 무리하게 코너를 돌다, 낙마하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역시 말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타야 한다. 미움이나 증오로 경마를 하면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반성한다. 이후 1977년 8월에는 8번 인기마이자 7세 암말인 미토모오를 기승해 니가타 기념을 제패한다, 야스다는 철저한 분석 끝에 승산이 있다 파악해, 친분이 깊은 기자에게 이긴다고 했으나, 기자는 '내가 네 마권을 사면 꼭 지더라. 이번에도 안 살 거야' 라고 회답한다. 그러나 단승 배당 1260엔이라는 역배가 터지며, 그 기자를 제외한 야스다의 지인들은 100만엔 단위의 큰돈을 벌게된다. 이후 1978년 퀸 컵을 14마리 중에 14번 인기인 키쿠키미코로 우승하며 단승 8410엔을 터트린다. 야스다는 과거 키쿠기미코의 마주에게 본인이 진 말들의 낙첨 마권을 산더미 처럼 모아둔것을 받은 적이 있기도 했기에,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고. 또한 아시히 다이오로 카부토야마 기념을 제패했고, 1981년의 마이니치 왕관에서는 9번 인기마 주지아로로 또다시 대이변을 터트리며 단승 2260엔을 터트린다. 그러다 그의 스승인 카토 야사지로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이자 반항적인 태도를 보일때마다 야스다를 때리면서 훈육한 카토 슈스케의 마방으로 소속을 옮기게 된다. 1982년에는 마루젠스키의 자마인 7번 인기마 니시노 스키와 함께, 아버지가 떠오르는 대도주로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를 제패했고, 단승 1380엔과 연승복승 3930엔을 터트린다. 그 후, 1985년부터는 프리 기수가 되었고, 또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기수 면허도 획득, 경력 20년차인 1987년에는 유와 제임스로 킷카상 2착과 아리마 기념 2착, 아사카 투 비트와 천황상 가을 3착을 하는 등의 모습과 함께, 59승을 달성하며 전국 8위 기수가 된다. 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갔고, 비록 G1급 경주에서는 큰 힘을 쓰지는 못했지만 1989년 케이세이배를 스피크 리즈로 우승하면서, 헤이세이 최초의 JRA 관동 지역 중상 우승 기수가 되었지만. 정작 야스다는 마주에게 조차 마권을 사지 않는게 좋겠다며, 승리를 확실시 하지 않았다. 1993년에는 유키노 비진에 기승해, 오카상과 오크스에서 모두 2착으로 패했고, 1995년에는 마이니치 왕관에서 스가노 오지를 기승하기로 한 오사키 쇼이치가 같은 날 열린 교토대상전의 출전을 위해 기승을 못하게 되자 대타로 기승, 트로트 썬더와 사쿠라 치토세 오, 제뉴인 같은 강호들을 모두 꺾고 단승 6040엔이라는 파란으로 우승한다. 1996년에는 노블 글래스로 삿포로 스프린트 스테이크스를 제패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JRA 전 10장 중상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 9개월, 팬들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축하해줬고, 시즌 후에는 도쿄 경마기자클럽상 특별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대기록 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갔고, 1999년에는 오사키 쇼이치의 은퇴로 현역 최고령 기수가 되나. 말년에는 간 질환을 앓으면서 술을 줄인 채 기승을 이어갔다. 40대 후반부터 오랜 기간의 과음으로 인해 간이 크게 손상되었고, 매주 주말마다 간을 치료하는 주사를 맞으면서도 말을 탔다. 2000년에는 기수 생활 33년 만에 처음으로 반년 동안 승리를 기록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는다. 그러던 중 야스다 기념 전날인 6월 3일, 도쿄 제12경주 5세 이상 500만 엔 이하 조건전에서 리뷰 반탐과 함께 승리하며 긴 무승 행진에서 벗어났으나, 2001년, 기승 횟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후쿠시마 개최 마지막 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탈 말이 한 마리도 배정되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되었고, 그는 7월 말 은퇴를 발표, 같은 해 9월 2일부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당일은 제 2회 최종일 니가타 경마장에서 기승. 오전 경주에서 2승을 거두었고, 점심 휴식 시간에는 은퇴식이 열렸다. 야스다의 마지막 우승은 제 4경주 3세 미승리전의 반담 프레저였으며, 마지막 기승 경주는 제 11경주 니가타 2세 스테이크스의 메이세이 프리마로, 마지막 성적은 10마리 중 8위였다. 은퇴 후에는, 경마 예상 회사 싱크탱크의 정보 루트 담당자로 취임하거나 데일리 스포츠 평론가로 활약했으나, 경마에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현재는 경주마 육성 목장 TOMY를 설립해, 여생을 보내고 있다. 통산 성적이나 GI 승리 수만 보면 최고 반열의 스타는 아니지만, 말의 능력을 끌어내는 기술, 경기 흐름을 읽는 눈, 인기 없는 말을 우승시키는 능력만으로 역대 최초로 JRA 전 10장 중상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야스다 토미오라는 기수는 확실한 명기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간만에 쓰는 기수글인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더 쓰게되면 이 분량 이상이면 분량을 쪼갤 생각입니다 많관부 그리고 실베좀 그만 보내다오... 출처: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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