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중국과 톰슨 기관단총
△1937년 상하이, 미 해병 2대대 F중대원들. 맨 왼쪽 톰슨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대원에 주목.
기관단총이 전장에 도래한 이래, 끊임없는 군벌 내전과 일본의 침공으로 신음하던 중국 대륙에도 기관단총에 대한 수요는 존재했습니다. 문제는 당대 중국의 빈약한 공업 생산능력으론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다른 소화기들이 그렇듯이 그때 그때 수급상황에 따라 수입무기들이 수요를 충당했습니다.
톰슨 기관단총은 1920년이라는 비교적 빠른 시간대에 시장에 공급되고 있던 관계로, 중국에서도 초기부터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였고 여러 군벌들이 톰슨을 구매해 사용했습니다.
△1924년 제 1차 중국국민당 전당대회 사진. 사진속 가운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쑨원으로, 앞서 이를 호위하는 병사들의 무장에 주목. 톰슨 기관단총과 드럼탄창으로 무장하고 있다.
기록상의 중국 내 톰슨 기관단총의 최초 구매기록은 1922년 중국 국민당이 쑨원의 경호병력에 지급하기 위해 30정을 구매한 것이 최초로, 일설에 따르면 천중밍의 반란(영풍함 사건) 당시 톰슨으로 무장한 경호병력이 안전하게 탈출하는데 주효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로 각 군벌들이 앞다투어 톰슨 기관단총을 구매하기 시작합니다.
△1925년 잡지 "Popular Mechanics"의 삽화. Cutts 컴펜세이터가 장착된 M1921AC를 장비한 중국 병사.
군벌들의 구매로 수백정의 톰슨 기관단총들이 중국에 유입되었지만, 이는 수요를 충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자연스런 수순으로 중국 조병창 내에서 톰슨을 복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집니다. 중국 내 톰슨 기관단총 복제 시도는 크게 두 곳에서 이뤄졌는데, 하나는 염석산(옌시산)의 산서 조병창에서, 다른 하나는 유상(류샹)이 이끄는 쓰촨성의 병기창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외 톈진 다구 조선소 등 여러 소규모 지역 공장들에서 복제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초기의 시도는 1923년 광저우 병기창에서 이뤄졌지만, 제대로 된 복제에는 실패했습니다.
△엉성하게 복제된 중국제 톰슨.
산서와 톰슨
△중화민국 17년 10월, 타이위안 조병창 제작, 휴대용 기관총.
1927년, 산서의 태원(타이위안) 조병창에서 드디어 복제에 성공하여 M1921 모델을 기반으로 한 생산품들이 중국에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산서 톰슨은 이후 M1928을 거쳐, 총열이 길어지는 형태로 다른 톰슨과 차별점을 가지게 됩니다. 생산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는 월 900정 가량을 생산했습니다.
△M1928을 기반으로 한 산서 톰슨
△장총열이 돋보이는 17식 산서 톰슨. 양각대와 총검 장착 러그가 추가되어 있다. 쓰촨 조병창의 영향일수도.
그러나 1930년 옌시산이 중원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타이위안 병공창의 주요 판매처는 군대에서 민간으로 전환되었고 그 영향으로 민간수요가 낮았던 톰슨은 생산량이 월 200대 정도로 대폭 삭감됩니다. 이후 중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타이위안 병공창이 점령당하고, 산서제 톰슨의 공급도 끊기게 됩니다.
중국 공산당에서 파견해 국민군에 합류한 팔로군 또한 산서 톰슨을 지급받았습니다만, .45ACP의 공급 문제로 인해 장기간 운용하기엔 무리였고 중일전쟁의 여파가 강해지자 탄약문제로 인해 팔로군의 손을 떠나 2선급 화기로 공산당이 지원하는 민병대에 지급되었습니다.
△1936년, 톰슨으로 무장한 중국 홍군. 해리슨 포먼(Harrison Forman) 촬영.
△1944년, 각종 화기로 무장한 중국 민병대. 해리슨 포먼(Harrison Forman) 촬영.
쓰촨과 톰슨
△중화민국 21년 8월, 제21군 무기 수리창 제작, 휴대용 기관총. 개머리판의 마크는 나중에 중공군이 새긴 것이다.
쓰촨에서 생산된 톰슨은 쓰촨성 충칭에 소재한 제 21군 무기 수리창(후일 충칭 무기 수리창)에서 생산되었으며, 산서제보다도 M1923 톰슨을 닮은 형태로 제조되었습니다. 장총열, 양각대, 총검 러그가 쓰촨 톰슨의 특징입니다. 또한 탄환도 국내 수급상황에 맞춰 7.63x25mm 마우저 탄환을 사용했습니다.
공식적으론 중일 전쟁 기간동안 약 12000정의 복제 톰슨이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전과 전후 국공내전 시기 생산분을 총합하면 약 2만정 정도 제조되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쓰촨 톰슨을 장비한 팔로군 병사. 총검을 장착하고 있다.
렌드-리스 톰슨
1935년부터 중립법(Neutrality Acts)에 따라 중국은 미국에서 무기를 수입할 수 없었으나, 1939년부터 미국의 중국 원조가 시작되었고 1941년부터 렌드-리스가 본격화됨에 따라 버마로드 등의 수송로를 통해 군사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제 기관단총 약 63000정이 중국에 지급되었으며, 이 물량 대부분이 톰슨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쟁과 톰슨
여러 경로로 입수된 톰슨 기관단총은 중국내 군벌, 국민당군, 공산군에게 광범위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부는 일본군이 노획해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팔로군에서 그러했듯이 중국 대륙에서 .45ACP를 지속적으로 구하는 것은 어려웠기에 장기간 사용되진 않았습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중국대륙의 최종 승리자가 된 중국 공산당은 각종 톰슨을 인민 해방군에게 보급했고, 6.25 전쟁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이중엔 다시 미군에게 노획되어 돌아온 톰슨도 일부 존재합니다.
△미 해병대가 장진호에서 노획한 중공군 장비. 톰슨이 보인다.
△위 노획톰슨의 자세한 설명이 담긴 쪽지와 개머리판의 명패. 내용에 따르면 육군 제 7사단 31야전포병대대 소속으로 해병 1연대에 파견된 유일한 전방관측 장교였던 제임스 H.딜(James H. Dill) 중위의 소지품으로, 해병 1연대 제3대대 장병들이 그에게 선물한 것이다. 쪽지에 따르면 이 톰슨은 해병대가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것으로, 압록강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노획해 사용해 왔다고 한다. 제임스 H. 딜 중위는 장진호 전투 당시 북한군 전차 12대가 공세를 가하자 31야전포병대대에 지원을 요청했고, 31야전포병대대는 155mm 야포 360발을 사격하여 적을 분쇄했다. 딜 중위는 이후로도 제31야전포병대대 B포대 부대장으로 복무했고,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6.25 전쟁이 끝나고도 톰슨 기관단총은 인민 해방군의 편제에 남아있었으나 1956년 무기 표준화 사업을 거치면서 2선급 화기로 전용되었고, 민병대같은 2선급 군사조직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허나 고질적인 탄약문제로 운용상에 난맥이 있었고, 이에 따라 1960년대 들어서 토카레프(51식 권총)의 탄환(7.62x25mm 토카레프)과 54식 기관단총을 사용하도록 개조되었습니다. 이렇게 개조된 톰슨들은 세계 각지의 분쟁지대에 판매되거나, 민간에 흘러들어 영화 촬영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출처 : https://www.reddit.com/r/ForgottenWeapons/ The Thompson in China: A Brief Overview of Domestic Thompson Submachine Guns 시리즈
https://www.machinegunboards.com/forums/index.php?/topic/20322-chinese-thompson-gunners/
https://www.machinegunboards.com/forums/index.php?/topic/29275-article-on-chinese-thompson/
추가) 쓰촨성 군벌 류원후이의 형이자 대지주였던 류원차이(유문채)가 휘하 사병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개인소유 공장에서 톰슨을 복제하려던 시도가 있었는데...
갸아아악 구와아아악
출처: 군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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