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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촬영과 렌즈에 대해 수박 겉핥아보기

Nno(150.160)· 2026.07.26 15:03· 조회 4169
언택트톡에서 나홍진이 말했던 것 중에 내가 흥미롭게 여겼던 건, 홍경표 DP와 촬영 준비를 위해 만났을 때 렌즈부터 찾아달라고 했다는 말이었어. 보통 크랭크인 전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감독과 촬영감독이 여러 번 미팅을 하면서 어떤 룩을 지향할지, 어떤 포맷으로 찍을지, 어떤 렌즈를 쓸지 같은 이미지 방향성과 기술적 솔루션을 정하는 시간을 갖게 돼. 아나모픽으로 가고 싶다거나 화면비는 스코프로 하고 싶다거나, 감독이 특별히 원하는 게 있으면 미리 조건으로 걸어두고 시작하기도 하고. 그리고 한국에서 필름 촬영은 현실적으로 고려 대상이 아니니까, 포맷을 정한다는 건 곧 디지털 이미지 센서 규격을 정한다는 뜻이고, 그걸 바탕으로 카메라 바디까지 정한다는 의미인 셈이야. 정리하면 룩을 먼저 정하고 그걸 구현할 기술적인 도구들을 정하는 순서인데, 센서 사이즈와 렌즈 마운트가 확정돼야 커버리지가 나오는 렌즈군이 좁혀지기 때문에, 카메라를 먼저 정한 다음 거기 맞는 렌즈와 각종 액세서리까지 견적을 내는 게 일반적인 순서야. 이걸 그냥 탁상에서 회의만 해서 정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여러가지 포맷과 렌즈를 일단 다 준비해와서 카메라 테스트를 충분히 해본 다음, 최종적으로 영화에 쓸 카메라 셋업이 정해지게 되는거지. 예를 들어 홍경표 DP가 이전에 작업했던 기생충의 경우, 좁은 실내 공간을 최대한 넓게 담기 위해서 65mm 대형 센서가 탑재된 알렉사65를 선택했다고 했어. 그리고 알렉사65와 호환되도록 설계된 아리의 DNA 렌즈를 선택하는 순서였고.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 호프는 렌즈를 먼저 정하고 시작하는 꽤 특이한 순서로 진행된 경우야. 나홍진이 렌즈를 먼저 정하자고 해서 홍경표가 과거 기생충 촬영 당시 썼던 DNA 렌즈를 떠올린 것 같고 아리렌탈 독일 본사에 DNA LF의 세트 여유분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DNA LF를 쓰기로 했으니 자연스럽게 카메라 바디는 알렉사LF와 미니LF로 정해지는거지. 이게 왜 중요하냐면, 렌즈를 우선 결정했다는 건 호프의 이미지를 만드는 출발점이 영상 스펙시트가 아니라 광학에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야. 카메라 바디는 해상도, DR, 프레임레이트, 코덱 같은 영상의 기술적인 스펙을 규정하지만 렌즈는 카메라 센서가 빛을 수집하기 이전에 광학적으로 이미지의 성격과 공간감을 만들어 주는 장비이거든. 그리고 이때 렌즈가 이미지에 입힌 특성은 포스트에서 고치기가 아주 힘들기 때문에, 렌즈 선택은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해. 아리의 DNA 렌즈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대화된 빈티지 글래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수십년 전에 쓰였던 렌즈 유닛의 글래스를 베이스로 리하우징해서 만든 커스텀 수제작 렌즈라서 아리의 다른 양산형 렌즈인 시그니처 프라임이나 엔소 프라임과는 달리 당연히 판매는 안하고, 오로지 아리 렌탈에서만 제공하고 있어. 나홍진이 독일에서 DNA LF 여유분을 찾은게 운이 좋았다고 한 것도, 생산된 렌즈 세트 수량이 워낙 소수에 불과해서 그런 표현을 썼을거야. 물론 드론으로 촬영한 오프닝의 이스태블리셔 같은 일부 샷은 균일성이 중요하니 시그니처 프라임을 쓰기도 했지만, 메인 렌즈는 어디까지나 DNA LF였던 것으로 보여. 근데 스펙이 더 좋은 알렉사65를 쓰지 않고 왜 더 센서가 작은 알렉사LF를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1. 촬영 시작 당시 알렉사65를 쓰려면 독일에서 아주 비싸게 가져와야 했다는 문제(지금은 국내에서 렌탈 가능) 2. 알렉사LF의 고속 FPS 촬영 성능이 더 좋다는 장점 3. 알렉사65보다 알렉사LF의 ARRIRAW 데이터가 더 가벼워서 처리하기 더 효율적이라는 점 4. 액션 시퀀스를 촬영하려면 알렉사 미니LF처럼 작은 폼팩터 카메라도 필요한데, 이러면 DNA 세트를 65용과 LF용 전부 공수해와야 한다는 난제 등이 고려된게 아닐까 대충 추측을 해봄 사실 DNA 렌즈는 귀한 물건이라서 내가 직접 접해본 적은 전혀 없지만, 여러가지 촬영 푸티지나 리뷰들을 찾아봤을 때 알 수 있는 것들은 있었어. 이미지를 아주 날카롭고 깨끗하게 담는 요즘 렌즈들에 비해서는 텍스처가 부드럽고, 광학적으로 약간 통제하기 힘든 빈티지 룩 성격이 강한 편인데 대신 하우징이나 조리개 매커니즘, 렌즈 마운트를 현대적으로 완전히 재설계해서 요즘 프로덕션에서도 무리없이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해. 알렉사LF의 표준 렌즈 격인 시그니처 프라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DNA 쪽이 샤프니스가 떨어지는 것이 보이지 다각형 조리개 때문에 그 모양대로 각진 보케가 생기는 다른 빈티지 렌즈들과 달리, 원형 조리개를 쓰기 때문에 거의 완벽한 서클로 보케가 생성된다고 하고, 아리 카메라에 별도의 어댑터 없이 장착 가능하고, 포커스 팔로워나 매트박스 같은 다양한 렌즈 악세서리와도 호환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호프의 주된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DNA LF 렌즈의 독특한 광각 룩에서 오는 것 같았어. 25mm 정도의 광각으로 찍은 장면이 엄청나게 많은데, 심지어 클로즈업이나 미디엄 투샷조차 광각으로 찍은 비중이 상당한 영화야.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아주 정교한 디테일로 호포항 마을 세트를 만들었다던가, 루마니아의 광활한 국립공원까지 가서 숲 로케이션 촬영을 한 걸 보면, 나홍진이 영화 속 배경을 실제 촬영으로 담아내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광각 렌즈로 그 배경을 아주 유감없을 정도로 넓게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아. 그런데 광각 렌즈를 사용할 때의 일반적인 딜레마가 피사체가 조금만 멀어져도 너무 작게 보이고, 너무 가까우면 얼굴 왜곡이 심해진다는 것인데, DNA는 특이하게도 다른 렌즈와는 달리 동일 포컬랭스에서도 풀숏 피사체의 크기를 크게 담아내고, 가까운 피사체의 얼굴이 왜곡으로 거의 망가지지 않는 아주 독특한 렌즈야. 연출적으로 이건 상당히 큰 장점이 될 수 있는데, 컷을 나누지 않고 배경과 인물을 한 숏에 물릴 수 있으니, 와이드에서 인물로 붙는 이동을 컷 없이 카메라 무빙만으로 처리할 수 있고 클로즈업 중에도 관객이 그 인물이 지어놓은 마을 안인지, 루마니아 숲 한복판인지를 계속 인지하기 편해지거든. 바미기르한테 쫓겨 도망치는 황정민을 중앙에 두고 마을 배경을 넓게 찍는 샷들을 떠올렸을 때, 여기서 배우가 작게 담겨서 배경에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야. 인물을 공간에서 떼어내지 않고 붙잡아둠으로써, 위협의 스케일과 인물의 감정을 분리하지 않고 같은 프레임에 둘 수 있다는 미학적인 장점이 있는 셈이지. 그리고 해상력이 아주 높은 센터를 중심으로 주변이 부드럽게 폴오프되는, 뭔가 아나모픽 렌즈에서나 볼 법한 특성 덕에, 센터 포커싱된 캐릭터와 액션에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프레임 안에 배경을 다 담으면서도, 거기서 인물을 분리하여 그 중심에 두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난 왜 나홍진과 홍경표가 이 렌즈를 먼저 선택하게 되었는지 뭔가 시각적으로 이해가 되더라고. 그런데 이런 빈티지 글래스는 사실 호프처럼 VFX가 헤비하게 들어가는 영화에 잘 쓰이지 않는 편이야. 왜냐하면 VFX 작업은 기본적으로 원본 영상에서 있던 걸 지우고, 없던 걸 덧입히며 마구 손상시키는 작업이라, 원본이 최대한 선명하고 광학적으로 정확해야 작업하기 좋은데 저런 빈티지 글래스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미지를 정확하게, 선명하게 담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래서 아마 여기부터 말할 내용은 호프의 VFX가 실패한 지점에 대해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해. 호프의 영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하이라이트의 방향을 따라서 흩어지는 보케라던가 마치 헐레이션처럼 색수차가 생기는 렌즈 특성이 눈에 꽤 띄는 편인데, VFX로 수정한 요소들은 렌즈를 통해 담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렌즈 고유의 특성을 레이어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하다보니, 컴포지팅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겠지. 시그니처 프라임과의 플레어 테스트 비교를 봐도, DNA는 플레어를 애써 억제하지 않는 렌즈라는 걸 알 수 있어. DNA는 VFX를 많이 쓰는 프로덕션에 대한 고려까지 들어간 렌즈라서, 조리개값이나 포컬랭스 같은 것들이 메타데이터로 같이 기록되긴 하지만 DNA의 포커스 폴오프 특성이 일관적이지 않다 보니 단순 기계적으로 수치만 입력해서 반영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고 저렇게 광원에 의해 생기는 특성들은 데이터가 따로 없으니 눈으로 보고 수작업으로 매칭해줘야 하는 것들이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경우는 예산이 넉넉한만큼 많은 인력이 투입되니까 비교적 극복하기가 수월한 조건이지만 거기에 비해 영화 예산이 많이 모자른 한국이라면 (게다가 이런 규모의 포스트 프로덕션 노하우가 아직은 덜 축적된) 소화하기가 벅찰 수도 있는거지. 호프는 SF 영화인데도 고품질 세트와 로케이션을 배경으로 한 실사 촬영과 특수효과의 비중이 대단히 높은 영화인데 요즘 대형 SF가 볼륨 스테이지나 그린스크린으로 처리하는 부분을 상당 부분 실물로 밀어붙였고, 그걸 DNA LF로 넓고 선명하게 담아낸 덕분에 배경 실물감이 장난 아니야. 문제는 그만큼 크리쳐 VFX에게도 동일한 수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호프의 포스트 프로덕션 팀에게 주어진 과제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는거지. 이미 몇몇 장면에서의 저열한 VFX에 대해 말이 정말 많이 나오는 중이지만, 크리쳐 피부에 맺히는 광원 반사 표현 같은 아주 기본적인 컴포지팅마저 너무 서둘러서 작업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아쉬운 건 사실이니까. 만약 그린 스크린이나 LED 볼륨에서 촬영하고 풀CG 배경에 배우를 합성하는 방식이었다면, 배경의 실물감은 크게 희생될지언정 크리쳐의 이물감은 훨씬 덜 느껴졌겠지만 개성이 강한 빈티지 렌즈 사용에 더해서 배경까지 거의 다 실사 플레이트다보니 컴포지션에서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데드 레코닝에서 톰 크루즈의 바이크 다이빙 장면을 드론 촬영했던 업체가 호프의 각종 특수 촬영을 전담했는데 덕분에 할리우드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의 속도감을, 그것도 실사 촬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한 성취인 건 맞다고 봐. 하지만 컴포지션뿐만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정밀하게 캡처하는 모캡 기술이라던가, 크리쳐의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많이 느껴진 등 아직 이런 대규모 VFX 헤비 프로젝트에서 관객이 원하는 수준의 시각효과를 보여주는 것에 있어 부족함을 드러내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한국 영화의 기술적인 한계를 아주 극한까지 시험했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출처: 상업영화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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