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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기술자에서 과학조선을 꿈꾼 사람, 김용관

Ook(243.140)· 2026.07.26 23:55· 조회 6416
안녕하세요 구토TV의 메좆따리 입니다 오늘은 한구 과학기술유공자 김용관을 다룰 예정입니다 도자기 기술자에서 과학조선을 꿈꾼 사람 김용관, 그는 진정한 조선의 과학 이상주의자 였습니다 김용관은 1897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병수는 놋그릇을 취급하는 유기 도매상이었으며, 김용관은 세 형제 가운데 둘째였고 그의 호는 장백산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꽤나 유복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음을 알수 있죠 그가 성장하던 시기는 조선이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되어가던 격변기였습니다 학교 교육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고,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죠 김용관은 처음부터 학문적인 과학자가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산업 현장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길을 택했습니다 1912년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에 들어가 흙과 광물의 성질, 유약, 가마, 고온 소성법 등을 이론과 실습으로 공부했습니다 당시 요업은 단순히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벽돌,기와,도기,내화물 등 근대 산업과 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생산하는 중요한 공업 분야였습니다 그는 1913년 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졸업한 뒤 전공과와 특별과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이 과정이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1918년 요업과 제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탄생한 최초 세대의 전문 공업기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셈이죠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우수 졸업생이었던 김용관은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고등공업학교 요업과에서 약 1년간 더 공부했습니다 여기가 꽤 재밌는데, 그는 식민지 통치기관이 마련한 교육제도와 장학금으로 최신 공업기술을 배웠지만, 나중에는 그 기술을 이용해 조선인이 일본 산업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마친 그는 1919년 일본도기회사에서 잠시 실무 경험을 쌓은 뒤 귀국했습니다 이후 부산의 조선경질도기 분공장 건설에 기술자로 참여하고,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에서도 근무했죠 중앙시험소는 각종 공업 원료와 제품을 시험하고 기술을 연구하던 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기술자에게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선망받을 만한 직장이었죠 여기까지만 봐도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 였습니다 그러나 김용관은 안정적인 시험소 기술자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문제는 단순히 기술자가 몇 명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공장도 부족하고, 연구소도 부족하며, 발명가를 지원할 제도도 없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을 자기 삶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였죠 그의 관심은 점차 개인적인 출세에서 민족 전체의 공업 능력을 높이는 일로 옮겨 갔습니다 1920년대 조선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고 사용함으로써 조선인 기업과 산업을 키우자는 운동이었죠 김용관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는 단순히 조선 물건을 사자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 상품의 품질이 일본 제품보다 떨어지고 생산비가 더 비싸다면, 애국심만으로 소비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가 내린 결론은 확고했습니다 조선인 기업도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개선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생각에 따라 김용관은 경성공업전문학교 동문인 건축가 박길룡, 기술자 현득영 등과 힘을 모아 1924년 발명학회를 조직합니다 발명학회는 이름만 거창한 친목단체가 아니었습니다 발명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에게 특허 출원 절차를 알려주고, 도면을 그려주며, 재료를 감정하고, 제품 제작과 사업화를 상담해주는 일을 목표로 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특허상담소,창업보육센터,메이커 지원센터를 합친 것과 비슷했습니다 특히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생활 속 아이디어를 가진 자수성가형 발명가들을 돕는 데 의의가 있었죠 그러나 발명학회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회원들의 열정은 있었지만 돈도, 사무실도, 안정적인 후원자도 부족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는 발명품을 실제 상품으로 만들어줄 조선인 기업도 많지 않았죠 발명학회가 사실상 활동을 멈춘 뒤에도 김용관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27년에는 직접 벽돌 제조공장을 운영했는데요 그는 책상에 앉아 산업을 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원료를 구하고 가마를 때며 제품을 생산하는 직접 행동하는 기술자이자 사업가였습니다 하지만 작은 자본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원료 선정, 연료비, 가마 온도, 제품 불량, 운송비, 판매처 확보까지 모두 해결해야 했죠 김용관은 이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혼자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작은 자본으로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방법을 일곱 차례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벽돌 제조공정뿐 아니라 공장 경영에서 주의해야 할 점까지 설명한 실용적인 안내서였죠 그에게 기술은 전문가의 비밀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기술을 공유해야 조선인 공업 전체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용관이 과학학회가 아니라 발명학회라는 이름을 고른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이나 화학 연구로 일본을 따라잡겠다는 계획은 당장 실현하기 어려웠습니다 대학도, 연구비도, 실험실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생활 속 불편을 개선하는 발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농기구를 고치고, 가마를 개선하고, 새로운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은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도 관찰력과 창의력이 있다면 도전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테니까요 김용관은 발명을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과학기술 운동으로 보았습니다 작은 발명들이 쌓이면 조선인 기업의 경쟁력과 관심이 높아지고, 마침내 독자적인 공업과 연구기관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죠 김용관은 첫 실패로부터 약 8년이 지난 1932년, 박길룡,현득영 등과 다시 모여 발명학회를 재건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기술자들끼리 모이는 데 그치지 않고 변호사,언론인,교육자,기업인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특허와 법률 문제를 해결해줄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변호사 이인도 참여했습니다 발명가에게 아이디어가 있어도 복잡한 일본식 특허 문서를 작성하지 못하면 권리를 인정받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동시에 김용관은 발명가 몇 사람을 돕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조선 사회 전체가 과학과 기술의 필요성을 이해해야 발명가에게 투자하고, 발명품을 사용하고, 연구기관을 지원할 수 있다는걸 깨닫게 된거죠 그래서 그는 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1933년 6월 김용관과 박길룡 등은 발명학회 기관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했습니다 처음에는 특허 출원법, 발명품 설계, 공업 원료, 기계와 생산기술처럼 발명가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내용이 중심이었고 이후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생활과학,과학상식,사진과 화보,과학소설,세계 과학기술 소식까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잡지는 B6 크기로 한 번에 약 1,000부씩 발행되었습니다 월간지를 목표로 했지만 발행 형편은 좋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단체의 자금은 늘 부족했고,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도 있었습니다 몇 달씩 잡지가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럼에도 과학조선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이 주도해 만든 대표적인 종합과학잡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과학잡지로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용관은 잡지와 신문에 과학,발명,공업을 주제로 약 200편에 가까운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공식이나 이론을 자랑하는 대신, 과학이 밥을 먹고 집을 짓고 물건을 만들며 나라의 산업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잡지만으로는 과학에 관심이 없는 대중을 끌어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김용관은 과학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거대한 행사를 구상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과학의날 입니다 첫 과학의날은 1934년 4월 19일 열렸습니다 날짜는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의 기일에 맞췄는데 다윈이 당시 조선에서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과학자였고, 야외행사를 하기 좋은 봄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행사 내용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본격적이었습니다 라디오 과학강연이 방송됐고, 학교와 강당에서는 강연회와 좌담회가 열렸습니다 과학영화가 상영됐으며, 시민들이 공장과 과학 관련 시설을 견학했습니다 발명품을 전시하고 기술 상담도 진행했습니다 과학을 책 속 지식이 아니라 눈앞에서 작동하는 힘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죠 특히 1935년 두 번째 과학의날에는 자동차 54대가 경성 시내를 줄지어 달렸습니다 자동차 한 대도 보기 힘들던 시절에 54대의 행렬은 그 자체로 거대한 움직이는 과학전시회였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자동차를 구경했고, 신문들은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와 같은 표어를 실었습니다 기념식에서는 유명 인사들이 강연했고, 과학의 노래도 연주되었습니다 과학을 음악,영화,자동차,강연이 결합된 대중문화 행사로 된것이고 사실 오늘의 과학의날 행사의 원형이라 볼수 있겠죠 김용관의 목표는 사람들이 하루 동안 자동차를 구경하고 과학강연을 듣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과학의 날과 과학조선을 통해 모인 관심과 후원을 바탕으로, 조선인 과학자와 발명가가 실제 연구를 할 수 있는 이화학연구기관을 세우려 했습니다. 물리,화학 실험실을 만들고, 발명가가 아이디어를 시험하며, 시제품을 제작하고, 기술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상설기관을 구상한 것이죠 즉 김용관의 계획에는 세 단계가 있었습니다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고 -> 발명가를 발굴하고 -> 연구소와 산업으로 연결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과학 홍보가 아니라 과학기술을 생산하는 독자적인 조선인 체제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 연구소를 세울 자금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기는 어려웠고, 그의 이화학연구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과학지식보급회의 활동이 커질수록 총독부는 이를 단순한 문화행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행사에서는 조선인이 자기 힘으로 기술을 익히고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되었습니다 조선인이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고, 수많은 시민을 모으며, 신문과 학교가 협력했죠 총독부 입장에서는 과학이라는 말 뒤에 민족의 자립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숨어 있다고 볼 만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인력,자원,산업을 전쟁에 총동원하기 시작했고, 자주적인 조선인 사회단체를 강하게 통제했습니다 1938년 제5회 과학의날 무렵 일제는 과학운동의 실무책임자였던 김용관을 체포해 투옥했습니다 과학의날 사실상 중단됐고, 조직은 빠르게 쇠퇴했죠 김용관이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발명학회와 과학지식보급회는 방향을 잃었습니다 총독부와 일본인 중심 과학단체의 압력도 거세어졌죠 1939년 이후 과학지식보급회는 점차 일본의 전쟁 동원정책에 협조하는 단체로 변질되었습니다 과학조선에도 일본어 기사와 군국주의적 내용이 늘어났습니다 1940년 무렵 발명학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관련 조직은 과학보급협회라는 친일적 조직으로 흡수,개편되었습니다 김용관은 이 과정에서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1940년 무렵에는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공개적인 과학운동 활동을 중단했죠 자신이 조선의 자립을 위해 만든 운동이 일본의 전쟁 선전에 이용되는 모습을 보며 떠난 셈이었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이었습니다... 발명학회도 무너졌고, 과학의날도 사라졌으며, 그토록 원했던 이화학연구소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찾아오자 김용관은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전처럼 거대한 과학대중운동을 재건하기보다는 자신의 원래 전공인 요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조선요업협회 부위원장을 맡고, 대한요업총협회와 요업학회 창립에 관여했습니다 광복된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주택,학교,공장,도로를 건설해야 했고, 여기에는 벽돌,기와,시멘트,도자기,내화재료 같은 요업제품이 필수적이었거든요 식민지 시대의 목표가 과학조선 건설이었다면, 광복 후 그의 구호는 요업한국 건설로 바뀌었습니다 정치적 독립을 얻었으니 이제 국산 원료와 국산 기술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는 해방 후 과학강연과 발명단체 활동에도 참여하며 옛 과학의날을 되살리려 했지만, 예전처럼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김용관은 대한요업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요업학회주보를 발간했습니다 당시 한국 요업계에는 대학 연구자와 공장 기술자가 서로 정보를 교환할 통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해외 기술자료를 구하기도 어려웠고, 어느 공장에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었죠 김용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매주 주보를 만들었습니다 해외 요업기술, 원료 정보, 공장 소식, 연구 결과와 기술상의 문제를 모아 업계에 전달했습니다 무려 4년 넘게 이어진 작업이었죠 과학조선이 일반 대중을 위한 잡지였다면, 요업학회주보는 학계와 산업현장을 연결하는 전문 기술정보지였습니다 시대와 독자는 달라졌지만 기술정보를 혼자 독점하지 않고 널리 나누어 산업 전체를 성장시키려는 태도는 젊은 시절과 똑같은 모습 그 자체 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의 요업공장들은 심각한 연료난을 겪었습니다 도자기와 벽돌을 구우려면 가마를 매우 높은 온도로 오래 가동해야 하는데, 품질 좋은 수입 연료를 살 외화가 부족했거든요 김용관은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무연탄을 이용해 가마를 가동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무연탄은 불이 잘 붙지 않고 연소 조절이 어려워 기존 가마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는 직접 가마 구조와 연소방식을 개선하는 발명에 나섰습니다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외국 연료를 살 돈이 없다면, 한국에서 나는 석탄을 사용할 수 있는 가마를 만들자 하지만 산업계의 관심과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고, 그의 무연탄 가마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 대학,정부연구소,대기업 중심의 과학기술체제가 만들어지면서, 정규 연구기관 밖에서 활동하는 노년의 실무기술자 김용관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죠 김용관은 1956년부터 한국발명협회의 상무이사와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노년에도 발명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온돌과 난방,가마 기술을 중심으로 특허를 출원해 약 10건을 등록했습니다 1959년 상공부의 발명의 날 상을 받았고, 1965년 발명협회장상, 1967년에는 발명상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식민지 시대에 벌인 거대한 과학대중화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생전에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게 아쉬웠죠 김용관은 196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유명 대학의 교수도, 세계적인 논문을 쓴 학자도, 거대한 기업을 세운 사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만든 발명학회는 두 번이나 무너졌고, 연구소 건립은 실패했으며, 과학의날은 전쟁의 여파로 중단됐고, 무연탄 가마도 널리 보급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2020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되며 뒤늦게 재평가 받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조국에서 그의 염원을 알아준걸까요 학생들은 단순히 김용관을 과학의 날을 만든 사람이라고만 배우지만 그러면 그의 진정한 사상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는 과학을 소수 천재의 연구 성과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산업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 보았고 과학을 알리는 잡지, 발명가를 지원하는 단체,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 실제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과학 생태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는 말만 앞세운 계몽가도 아니었습니다 직접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고, 벽돌공장을 경영하고, 특허를 상담하고, 잡지를 만들고, 가마를 설계했습니다 실패하면 다른 조직을 만들었고, 조직이 탄압받으면 교사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다시 기술 현장으로 리턴 했죠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특정 발명이나 기계가 아니라 우리도 과학을 배우고 발명하며 자기 힘으로 산업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 알려준 것이었고 지금 우리는 그의 사상 방향대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참고자료 https://www.koreascientists.kr/scientists/merit/merit-list/?boardId=bbs_0000000000000028&cntId=73&mode=view 이 글을 추천 드립니다 출처: 싱글벙글 지구촌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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