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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포)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리들리 스콧의 계승인가, 손절인가.sf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초중반부까지는 리들리 스콧의 프리퀄에 대한 팬덤의 반동처럼 보인다.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가 제노모프보다 데이비드, 엔지니어, 창조 신화, 생명의 기원에 더 집착한다고 느꼈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거의 사과문처럼 등장한다. 다시 낡은 우주 시설이 있고, 가난한 식민지 청년들이 있고, 페이스허거가 튀어나오고,
어두운 복도에서 무언가가 기어오며, 산성피와 체스트버스터와 제노모프가 영화의 전면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이제야 에이리언이 에이리언답게 돌아왔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다.
표면만 보면 [로물루스]는 리들리 스콧의 프리퀄을 반성하고, [에이리언]과 [에이리언2]의 감각을 복원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중심부를 뜯어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 영화는 스콧의 프리퀄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그 프리퀄의 핵심 질문을 더 대중적인 신체공포의 언어로 다시 번역한 작품에 가깝다.
스콧의 프리퀄이 싫었던 관객들이 불편해한 것은 단순히 검은 액체나 창조 신화 그 자체가 아니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질문이 너무 감독의 관념으로 전면화되면서, 에이리언 영화 특유의 육체적 공포와 생존 서스펜스를 밀어냈다는 점이었다.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에서 제노모프는 더 이상 단순한 우주 괴물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창조와 오염, 진화와 신성모독, 피조물이 창조주를 넘어서는 욕망의 결과물처럼 다뤄지고,
데이비드는 거의 그 질문의 인간형 화신으로 기능했던 캐릭터였다.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가, 창조주는 왜 피조물을 버렸는가, 피조물은 다시 창조주가 될 수 있는가.
스콧은 이 질문들을 숨기지 않고 정면에 놓는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야심적이고, 누군가에게는 에이리언 시리즈가 갑자기 자기 철학을 설명하느라 괴물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반면 [로물루스]는 같은 재료를 쓰면서 태도를 바꾼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검은 액체를 버리긴커녕 다시 작품의 핵으로 삼는다.
유타니가 생명을 개량하고, 인간을 더 강하게 만들고, 죽음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욕망도 버리지 않는다.
인공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 인간을 도구처럼 취급하는 기업의 논리, 생명을 상품화하려는 탐욕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그것을 데이비드의 독백 대신 제대로 호러와 액션 장르로 그려낸다.
[로물루스]는 스콧이 던진 “생명은 설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철학 강의실에서 끌어내려
임신한 몸, 오염된 혈청,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는 태아, 인간과 제노모프 사이 어딘가에 있는 끔찍한 신생아의 형상으로 보여준다.
리들리 스콧이 우주적 시로 풀어낸 것을 페데 알바레스는 분만실의 악몽과 복도의 비명으로 바꿔 말한다.
그래서 [로물루스]의 후반부는 단순한 원점 회귀가 아니다.
영화가 정말로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를 실패한 곁가지로 취급했다면, 그냥 제노모프를 다시 괴물로 세우고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가장 불쾌한 결실은 순수한 제노모프가 아니라,
프리퀄이 남긴 생명공학적 저주가 인간의 몸을 통과한 결과물이다.
이 지점에서 [로물루스]는 팬덤에게 “우리가 다시 에이리언답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속으로는 “하지만 스콧이 열어둔 문은 닫지 않겠다”고 말한다.
검은 액체는 여전히 세계관의 핵심 독이고, 기업은 여전히 그것을 인류의 미래라고 부르며,
그 미래는 언제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형태의 생명으로 되돌아온다.
결국 [로물루스]는 리들리 스콧의 프리퀄을 정면으로 계승한 영화도, 완전히 거부한 영화도 아니다.
더 정확히는 스콧의 테마를 받아들이되 스콧처럼 말하지 않은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팬들이 원한 복고적 에이리언의 감각을 제공하면서도,
실제 이야기의 엔진은 스콧 프리퀄의 생명 창조 담론에 연결해둔다.
[로물루스]는 리들리 스콧을 버린 영화처럼도 보이고, 아예 그를 숭배하는것처럼 만든 영화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을 화면 밖으로 밀어낸 뒤 그의 질문만 괴물의 몸속에 숨겨놓은 영화라는걸 끝내는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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