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학벌, 아직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브랜드론으로 풀어봤습니다)
요즘 학벌이 크게 의미가 있나요?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9240274?od=T31&po=0&category=0&groupCd=communityCLIEN
원글 보고 몇자 적습니다.
입시 때 힘드셨던 얘기에 재수한 저도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가 갈것 같아 마음이 짠합니다.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학벌이 왜 아직도 작동하는지 '브랜드'라는 렌즈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저는 학벌 만능론자는 아니고요, 그냥 "이게 왜 안 죽는지"를 설명해보려는 겁니다.
1. 학벌은 간접적으로 작동하는 품질보증서입니다.
업무 측면에서 사람하나 제대로 파악하려면 최소 몇 달 일을 같이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채용, 인력 배치, 투자 심사에서는 그 시간이 없죠. 그래서 성실성, 지능, 사회성, 지두력(일본말인데 해당하는 한국어가 없어 그냥 씁니다. 죄송)을 한 방에 압축해주는 프록시 인덱스를 찾게 되는데, 그게 학벌입니다. 정확하냐고요? 아니죠. 근데 아주 짧근 기간에 이만큼 알려주는 지표가 달리 없습니다. 댓글에서 어떤 분이 엑스레이에 비유하셨던데 정확합니다. MRI만큼 정밀하진 않은데 싸고 빠르잖아요.
VC 시장 가보시면 이게 제일 노골적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창업자의 유일한 담보가 "이 사람 자체"인데, 매출도 없는 시드 단계에서 뭘 보겠습니까. 학벌과 그 사람 커리어 중 제일 좋은 회사 봅니다. 대놓고는 말 안 하지만요.
블라인드 채용이 역설적으로 이걸 증명합니다. 학벌 가리고 시험 보면? 결과가 대충 학벌순으로 나옵니다. 간판을 가려도 간판이 담고 있던 내용물은 안 가려지는 거죠.
2. 동문이라는 이름의 상호부조 조합
장교들 보면 병들과 달리 처음 보는 아래 계급 장교한테도 존댓말 씁니다. "같은 물을 먹은 사람"이라는 동류의식 때문이죠. 명문대 동문 사회가 딱 이렇습니다. 처음 보는 후배인데도 일단 한 수 접어주고 시작합니다. 밥 한 끼 사주고, 슬쩍 정보 흘려주고, 결정적일 때 전화 한 통 받아줍니다. 이게 음으로 양으로 쌓이면 무시 못 할 자산이 됩니다. 심지어 사고를 쳐도 "쟤가 그럴 애가 아닌데" 하면서 기회를 한 번 더 줍니다. 브랜드의 A/S 보증이죠.
3. 브랜드가 사람을 채찍질합니다
재밌는 건 이 브랜드가 소유자 본인도 괴롭힌다는 겁니다. "OO대 나온 애가 이것밖에 못 해?"라는 시선이 무서워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됩니다. 주변 기대에 부응하려는 압박이 향상심으로 전환되는 거죠. 명품 가방 들면 옷도 신경 쓰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학벌 좋은 사람이 성과도 좋은 게, 원래 잘나서만이 아니라 브랜드가 등 뒤에서 계속 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4. 학부 간판은 사실상 신분 비슷한 겁니다
세게 말하면, 한국에서 학부 학벌은 귀족 계급 비슷하게 작동합니다.
평생 못 바꿉니다. 대학원으로 세탁을 시도해도 "학부는 어디셨어요?"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닙니다.
아무도 면전에서 안(못) 물어보는데 다들 궁금해하고 다들 서로 압니다. 이 침묵과 호기심의 조합, 신분제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전부는 아니어도 그 사람과 그 집안, 그리고 주변 사람에 대해 꽤 많은 걸 말해줍니다.
가치관, 직업, 커리어 경로에 평생 영향을 줍니다. 심지어 결혼까지도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족이나 친구 학벌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 조카가 이번에..." 이런거 다들 한두번 해보시거나 들어 보지 않으셨나요?
5. 그래서 결론: 브랜드력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아직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브랜드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제품 세계에서도 그렇잖아요. 제품 수명은 짧아지고, 브랜드 말고도 사용 후기, 비교 리뷰 등 품질을 확인할 경로가 많아지고, 평균 품질 자체가 올라가면서 브랜드 프리미엄이 줄었습니다. 학벌도 똑같습니다. 취업은 사실상 인턴 검증제가 됐고, 학교 밖 학습 기회는 넘치고, 한 직장 체류 기간은 짧아져서 "간판보다 최근 3년 뭐 했는지"가 중요해졌죠. 여기까지는 원글에 동의합니다.
다만 한 가지, 학벌은 평소엔 안 보입니다. 승진 심사, 투자 유치, 결정적 첫 만남 배우자 선택 같은 결정적 순간에서는 작동합니다. 평소에 안 보이니까 "요즘 학벌 안 보던데?"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정작 인생의 갈림길마다 조용히, 그러나 어김없이 나타납니다.(김연아도 고우림이 서울대 졸업한것이 결혼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이 브랜드, 20살 언저리에 한 번 결제하면 평생 쓰는 라이선스입니다. 영향력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쳐도, 한 번 사서 수십년 쓰는 물건이면 라이프타임 투자수익률로는 여전히 괜찮은 장사입니다. 물론 서울대 공대 갈 실력으로 지방대 의대 갈 수 있다면 그건 브랜드력 대신 다른 가치를 택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일 수 있지만요. 이런 확실한 대안이 있는 게 아니라면, 살 수 있는 시기에 최대한 노력해서 사두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한정판이에요. 그 시기 지나면 얻을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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