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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온 편지 (6/8)
5장 — 결혼이라는 말, 그 후..
'결혼'이라는 말이 오간 뒤에도, 우리 사이의 온도가 늘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얹히자, 그녀의 편지는 더 자주 흔들렸다. 플루트 때문에 서운했던 그 통화의 여파가 며칠 더 이어졌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네가 날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것처럼 나또한 그래. 너를 이해하기보다는 네게 나를 이해받고싶어. 내가 널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날 훨씬 더 사랑해줬으면 좋겠구…. 네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곳에 있는 나를 좀더 이해해주면 안되겠니?
그날의 편지는 그녀가 스물세 살의 밑바닥에서 쓴, 가장 어두운 문장들로 끝났다.
그냥 힘들어. 꿈이 무엇인지. 목표가 뭐였는지. 왜 이렇게 사는건지… 일은 왜 해야하는지. 공부는 왜 해야하는지.. 왜 숨쉬며 아직 존재하는건지… 혼자 살아야 하는건지. 둘이 살아야 하는건지. 이곳에서 있어야 하는지.. 모든게.. 나를.. 힘들게 해. 세상이 싫다. 내가 싫다.
지금 이 문장들을 다시 읽으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때 나는 뉴욕에서 내 삶을 세우느라 바빴고, 편지 속 그녀가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었는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30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날의 그녀 곁에 뒤늦게 앉아본다.
다행히 그 어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며칠 뒤, 시험이 끝나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담임 선생이 최고점을 주고 싶었다더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그녀는 다시 장난스러워졌다.
시험이 끝나니까 이렇게 맘이 편할수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고 수백번 아니 몇천만번 아니 죽을때까지 얘기해도 안질릴것 같아. 네가 지겹다고 도망다니면 어쩌지?… 할수 없지 뭐. "팔자"니까. 으하하하…
이 무렵 그녀는 결혼이라는 말을 두고 나를 다독이기도 했다. 너무 서두르지도, 걱정하지도 말자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아까 전화로 걱정하지 말란 뜻은 말야.. 우리 결혼 너무 서두르지도, 걱정 하지도 말라는거야.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너와내맘이 중요한거잖아. 너무 성급히 생각하지 말자. 나두 너랑 매일 같이 있고싶어. 네말대로 더 좋은 시간들이 우릴 기다릴거야. 너와 나의 사랑을 사랑의 신이 질투해서 "뚝" 떨어뜨려 놓은걸꺼야. 그지?
4월의 그녀는 그렇게,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되풀이했다.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conservatorio로 향했다. 시간표를 편지에 그려 넣어 보내기도 했다. 성악 이론, 시민학, 피아노, 프랑스어 발음법. 왜 노래를 하는데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고 투덜대면서도, 그녀는 빠짐없이 다녔다.
내일은 약간 기대가 돼. 학교수업 첫날이니까. 우와.. 학교에 간다. 기뻐라…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는 이야기가 이 무렵 편지에 자꾸 나온다. 비누로 감아보고, 식초로 헹궈보고, 계란 노른자를 발라보기도 했다.
요즘에 머리카락이 굉장히 많이 빠져. 뭐 별로 신경쓰는 일도 없는것 같은데… 이러다가 여자 30대 대머리되는건 아닌지 원…
대머리가 될까 걱정이라는 그 가벼운 말투 뒤에, 나는 이제 그때 그녀가 겪었을 마음고생을 읽는다. 몸은 정직해서, 마음이 앓으면 몸에도 표가 나는 법이니까.
그런 중에도 그녀는 나를 걱정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잠을 못 잔다는 내 소식에, 그녀는 자기만의 처방을 적어 보냈다.
잠이 안올땐 머리를 비우고 혼자서 쬐끄맣게 노래를 해봐. 난 항상 그러거든…
내가 보낸 소포가 도착한 날의 편지도 있다. 향수 냄새가 밴 까만 곰인형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그 인형을 끌어안고 잤다고 했다.
새까만, 우리 미키처럼 까만 곰인형이 들어있었어.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말야.. 어제 저녁에 아니 밤에 잘때는 마치 너를 옆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어. 곰 인형에게서 나오는 향수때문에.. 꼭 끌어안고 잤거든… 고마와.
이 무렵 편지에는 내가 보냈을 물건과 편지의 흔적이 자주 비친다. 사진, 카세트테이프, 곰인형. 그녀가 "고맙다"고 적은 그 물건들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골라 부쳤는지는, 이제 나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은 것은 그녀의 대답뿐이다.
부활절이 지나고, 그녀는 노래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찬양에서 또 독창을 맡았고, 연습을 하고 또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이문세의 "이별 이야기"를 듣고있어. 그래서인지 더 슬픈것 같아. 썰렁하잖아. 혼자서 festeja 해야 하는 반년의 날이 말야…
우리가 만난 지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중 3분의 1을, 그녀는 나 없이 홀로 보냈다. 그녀는 나를 미워한다고, 무지무지 밉다고 적었다가, 이내 그 미운 마음을 접어두고 잠을 청했다.
난 말야 네가 아주아주 미워. 무지무지 미워. 미운마음. 때려주고 싶은마음 다 접어두고 잠을 청해야겠어. 꿈속에서 만나요… 안녕… 잘자요…
편지의 서명은 그날그날 달랐다. 연희였다가, 크리스티나였다가, 어떤 날은 “크리스티나 and 연희"라고 두 이름을 나란히 적기도 했다. 나는 그 여러 이름을 다 가진 한 사람을, 지구 반대편에서 편지로만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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